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 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 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어처구니 / 이덕규
재미있는 시다. 돋아나는 새싹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신선하고 특이하다. 보통은 새싹에서 갓난아기와 같은 청순하고 순수한 이미를 떠올리는데, 시인은 '속치마' '성감대' '알몸' 같은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도 전혀 외설스럽지가 않고 재미있다. 쉽게 읽혀지지만 이런 경지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시의 제목 또한 재미있지 않은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어처구니 없는 세상이지만, 이런 어처구니라면 아무리 많아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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