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6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 장석남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새벽길에 나서서 서리 앉은 한길에 앉아보았지 갈비뼈가 가지런하듯 겨울은 길어 차분하게 정이 들고 긴 겨울 동안 매일의 새벽은 이러한 고요를 가지고 왔던가 매 새벽마다 이걸 가져가라 함이었던가 왜 그걸 몰랐을까 겨울은 가면서 매 새벽마다 이 깨끗한 절망을 가져가라 했던가 꽃씨처럼 꽃씨처럼 - 겨울이 가면서 무어라고 하는지 / 장석남 낮 기온이 10도 중반까지 올라가니 봄이 확 다가온 듯하다. 즐겨 입었던 패딩 옷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동백꽃이 떨어지듯 한순간에 툭, 하고 겨울이 꺾이는 것 같다. 올겨울은 힘들게 보냈다. 그 여파가 아직 내 몸 안에는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선지 이 시 제목에 끌리면서 여운이 깊게 남는다. 내용 중에서는 '깨끗한 절망'이라는 구절에 오래 머문다...

시읽는기쁨 2019.02.25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주 서 있었다 일층은 주인이 살고 그 옆에는 바다 소리가 살았다 아주 작은 방들이 여럿 하나씩 내놓은 창엔 살구나무에 놀러온 하늘이 살았다 형광등에서는 쉬라쉬라 소리가 났다 가슴 복잡한 낙서들이 파르르 떨었다 가끔 옆방에서는 대통령으로 덮은 짜장면 그릇이 나와 있었다 감색 목도리를 한 새가 하나 자주 왔으나 어느 날 주인집 고양이가 총총히 물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살구나무엔 새의 자리가 하나 비었으나 그냥 맑았다 나는 나왔으나 그 집은 그냥 맑았다 - 살구나무 여인숙 / 장석남 '제주에서 달포 남짓 살 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시다. 요즈음 나도 그런 꿈을 꾼다. 요란스레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달포만이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고 싶다. 서해 바닷가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시읽는기쁨 2018.08.24

물맛 / 장석남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 - 물맛 / 장석남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을 때 물맛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으리라. 노자 선생은 '무미지미(無味之味)'를 최고의 맛으로 쳤다. 물맛이 바로 그 '맛 없음의 맛'이다. 맛도 없고 향기도 없는, 담박하고 탈색된, 인생의 내리닫이에서 이제는 훤칠한 물맛이 되고 싶다.

시읽는기쁨 2012.12.22

목돈 / 장석남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원을 받았다 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어머니의 임대아파트 보증금으로 넣어 월세를 줄여드릴 것인가, 말하자면 어머니 밤 기도의 목록 하나를 덜어드릴 것인가 그렇게 할 것인가 이 목돈을, 깨서 애인과 거나히 술을 우선 먹을 것인가 잠자리를 가질 것인가 돈은 주머니 속에서 바싹바싹 말라간다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돈봉투 끝이 나달거리고 호기롭게 취한 날도 집으로 돌아오며 뒷주머니의 단추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잘 있나, 그럴 성싶지 않은 성기처럼 더듬어 만져보고 잊어버릴까 어디 책갈피 같은 데에 넣어두지도 않고, 대통령 경선이며 씨가 말라가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바라보면서도 주머니에 손을 넣어 꼭 쥐고 있는 내 정신의 어여쁜 빤쓰 같은 이 300만원을,..

시읽는기쁨 2012.06.02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마음의 통증에는 주소가 없다. 어떨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온다. 원인을 모르는 신체의 병처럼,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정체 모를 통증은 두렵고 아프다. 지나간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모든 통증의 배후에는 그리움이 숨어 있다. 이루지 못한, 그냥 흘러보낸, 또는 아쉬움 같은 것, 그런 것들이 통증의 뒤..

시읽는기쁨 2008.05.27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고향집의 어머니는 며칠 전에 모내기를 하셨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모판에 있는 여린 벗잎의 색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라고 했다. 물이 찰랑..

시읽는기쁨 2008.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