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3

아름다운 구멍 / 장정일

카파도키아에서 사흘을 보내고 이스탄불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났다. 공항은 밤새 내린 폭설로 마비되었다. 대합실 통유리 밖으로 제설차가 활주로를 새로 닦는 모습을 구경하며, 폭설로 지연된 비행기 운행이 내 인생에 선사하게 될 뜻밖의 구멍을 상상했다. 뚱뚱한 스페인 아주머니들은 단체 여행을 왔다. 가죽점퍼를 입은 흑인 청년은 껌을 씹고 피부색이 갖가지인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말로 동맹을 맺는다. (카파도키아에서 여행 중에 몇 번이나 마주친 네 명의 한국 남자 대학생들, 이들은 영어로만 대화한다.) 몇 시간 만에 눈을 치우고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폭설을 감안하면 정상 운행이었다. 창밖으로 흘낏 본 남겨진 비행기들. 비스킷과 오렌지 주스를 사양하고 그보다 더 달콤한 꿈이 생각나 얼른 눈을 감았다. 이..

시읽는기쁨 2017.01.19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

시읽는기쁨 2008.10.18

Job 뉴스 / 장정일

봄날 나무벤치 위에 우두커니 앉아 를 본다 왜 푸른하늘 흰구름을 보며 휘파람 부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호수의 비단잉어에게 도시락을 덜어 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소풍온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놀라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비둘기떼의 종종걸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뭇잎 사이로 저며드는 햇빛에 눈을 상하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왜 나무벤치에 길게 다리 뻗고 누워 수염을 기르는 것은 Job이 되지 않는가? 이런 것들이 40억 인류의 Job이 될 수는 없을까? - Job 뉴스 / 장정일 개미나 꿀벌을 찬양하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인간의 고군분투란 Job을 얻기 위한, 또는 더 나은 Job을 차지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시읽는기쁨 2005.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