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훈 3

병에게 / 조지훈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虛無)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즉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날의..

시읽는기쁨 2013.04.01

경북 북부지역 가을 여행

지난 주말(2011. 10. 22.), 경떠모 회원들과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1박2일의 여행을 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내성천 이야기'였다. 고향에 미리 내려와 있던 나는 풍기에서 다섯 명의 일행과 합류했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풍기에서 갈비인삼탕으로 점심을 하고 순흥으로 이동해도호부 터를 찾았다. 옛 청사 자리에는 지금 순흥면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 관원들의 쉼터로 썼다는 정원이 일부 남아 있다. 연못을 파고 봉도각(逢島閣)이라는 정자도 세웠다. 그러나 지금 인간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고 노목들만이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오늘 같이 비 내리는 가을에 더욱 어울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죽계천을 따라 피끝마을로 갔다. 1456년,..

사진속일상 2011.10.28

山中問答 / 조지훈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도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낚는 맛을 자네 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마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 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老人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

시읽는기쁨 2004.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