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 3

됐심더 / 곽효환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았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애련한 시를 쓰는 한 시인이 선배 시인의 소개로 고고했으나 불의의 총탄에 세상을 뜬 영부인의 전기를 썼다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불행한 군인이었던 대통령이 두 시인을 안가로 초대했는데 술을 잘 못하는 풍채 좋은 선배 시인은 그저 눈만 껌벅였고 왜소했으나 강단 있는 두 사내가 투박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양주 두 병을 다 비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시인의 살림살이를 미리 귀띔해 들은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임자, 뭐 도울 일 없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인이 답했다 "됐심더" 강과 바다가 만나 붉게 타오르는 강어귀 언덕에서 가난 섞인 울음을 삼키던 여학교 사환이었던 소년은 꿈꾸던 시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일생을 적막하게 살았고 만년을 쓸쓸히 병마에 시달리다 눈을..

시읽는기쁨 2019.02.01

억만금을 준대도

옛사람이 현대인보다 지조 면에서는 몇 급 위인 것 같다. 그때는 선비 정신이란 게 살아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지켰다. 현실에 야합하는 간신 무리도 있었겠지만, 명분과 가치를 중시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그들은 현재의 고초를 기꺼이 감내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반면에 현대인은 즉물적이고 찰나적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실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고,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 누구나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가끔 생각한다. 억만금에도 팔 수 없는 내 안의 무엇이 과연 있는가? 백 억을 줄 테니 그걸 포기하라고 하면 "No!"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 억을 주겠다면 어찌하겠는가? 마지막까지 남는 게 있어야 그게 바..

참살이의꿈 2018.12.13

지조론 / 박주택

견딜 때까지 견디게나. 최후의 악이 부드럽게 녹아 인격이 될 때까지. 고통? 견디게나. 편안한 시간이란 쉬 오지 않는 법. 상처가 깊으면 어때. 깊을수록 정신은 빳빳한 법. 생각 끝의 끝에서라도 견디게나. 그 어떤 비난이 떼를 지어 할퀸다 할지라도 벼랑 끝에 선 채로 최후를 맞을지라도. 아무렴! 끝끝내 견디다가 산맥의 지리쯤은 미리 익혀놓은 후 영영 죽을 목숨일 때 바위, 뻐꾸기, 청정한 나무, 뭐 그쯤으로 환생하게. - 지조론 / 박주택 죽비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하는 시가 있다. 느슨하고 나른해지는 정신이 화들짝 놀란다. 좀더 치열하고 깊이 살아야 하는데라는 반성이 뒤따른다. 이 시를 만났을 때 문득 추사의 세한도가 떠올랐다. '歲寒然後知松栢'(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송백의 진가를 알게 된다). 시인은 ..

시읽는기쁨 2008.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