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억만금을 준대도

샌. 2018. 12. 13. 16:44

사람이 현대인보다 지조 면에서는 몇 급 위인 것 같다. 그때는 선비 정신이란 게 살아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건 지켰다. 현실에 야합하는 간신 무리도 있었겠지만, 명분과 가치를 중시하고 실천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그들은 현재의 고초를 기꺼이 감내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반면에 현대인은 즉물적이고 찰나적이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실제 돈이면 안 되는 게 없고,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다. 누구나 돈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가끔 생각한다. 억만금에도 팔 수 없는 내 안의 무엇이 과연 있는가? 백 억을 줄 테니 그걸 포기하라고 하면 "No!"라고 할 수 있겠는가? 천 억을 주겠다면 어찌하겠는가? 마지막까지 남는 게 있어야 그게 바로 '나'가 아니겠는가.

 

신흠(申欽, 1566~1628) 선생의 시 한 수에 오래 머문다.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梅香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

 

오동나무는 천 년을 묵어도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저도 본바탕이 변하지 않고

버들가지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매화는 평생 춥게 지내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梅香]" 옛 선비들이 왜 매화를 사랑했는지 이 구절로 짐작이 된다. 선비는 이익과 권력을 탐하지 않으니 춥게 지낼 수밖에 없다. 청빈(淸貧)은 오히려 선비의 자랑이었다. 추운 계절을 견디니 향기 더욱 영롱하다. 억만금을 준대도 매화는 자기 향을 팔지 않는다. 추위를 견디며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 선비가 많았으리라.

 

내가 살아가야 할 자세를 이 시는 가르쳐 준다. 그저 시류에 편승해 산다면 부평초 같은 생밖에 안 된다. 부화뇌동하며 흔들려도 마찬가지다. 내 우울의 원인은 대부분 내 썩은 욕망 때문이다. 향기를 팔 준비가 되어 있는데 향기를 사려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악취만 날 뿐이다. 억만금을 준대도 고개를 저을 수 있는 '그것'이 있는가? 오동나무, 매화, 달, 버들가지를 보며 겸허히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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