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무덤덤에 대하여

샌. 2018. 12. 31. 17:44

노인이 된다는 건 감정이 무뎌지는 일이다. 희로애락의 진폭이 점점 줄어든다. 젊은 시절의 가슴 설렘은 멀리 사라져 간다. 크게 웃을 일도 뜸해진다.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할지 모른다. 감정의 요동이 적으니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차분하게 인생을 관조하는 게 가능해진다. 웃을 일이 적다지만, 애통할 일도 줄어든다. 잃으면 얻는 게 있다.

 

청춘에는 약동하는 젊음이 있지만, 온갖 번뇌와 열정에 시달려야 한다.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가만두지 않는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반면에 노년은 따스한 온기를 품은 화로와 같다. 사람들은 화로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하루의 얘기를 속삭이듯 나눈다. 고된 노동 뒤 안식의 시간이다. 솔직히 말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이 좋다.

 

무덤덤하게 살고 싶다. 목표가 없고 하고픈 일도 그닥 없는 건 좋은 일이다. 노인이 되어서도 젊은 시절처럼 아등바등한다면 얼마나 꼴불견이겠는가. 시류가 부추기는지 몰라도 '젊은 노인' 타령을 하는 이도 곧잘 보인다. '마음은 이팔청춘'이라는데 당사자는 얼마나 괴로울까 싶다. 몸과 마음이 엇박자를 내면 균형 잡힌 삶이라 할 수 없다.

 

무덤덤하다는 건 바위를 닮은 삶이다. 감정의 변화 없이 늘 그 자리에서 묵묵한 모습이다. 무덤덤하게 살다 보면 죽음마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바위 같은 진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 시인 유치환은 바위가 되고 싶은 소망을 이렇게 노래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아무도 바위를 보고 생명이 없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바위는 생명이 지향할 완성체가 아닌가. 바위는 해탈이요 구원의 징표다. '무덤덤'이라는 말 속에는 살아서 바위를 닮으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징징대지 않고, 호들갑 떨지 않고, 경망되이 나대지 않으려는 다짐이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자세다.

 

바위를 닮는다고 목석 같은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감정의 기복이 적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삶이다. 그것이 무덤덤함이다. 또한, 무덤덤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깨달음의 삶이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무덤덤은 체념과 통한다. 무덤덤과 체념은 인생 고단수의 경지다. 소아(小我)를 포기해야 가능하다. 받아들일 수 없음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이다. 패배주의자의 비굴한 용어가 아니다.

 

초연해지지 않고서는 무덤덤하게 살 수 없다.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게 아니다. 얼마 만큼 감정을 과잉 낭비하며 살고 있느지 자신을 살펴보라. 오늘도 나는 작은 일 하나를 붙잡고 속을 끓이며 보내고 있다. 범인(凡人)의 일상이다. 어찌할 수 없음이야, 라고 나는 나에게 속삭여준다. 무덤덤하지 않고서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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