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정원사의 방울

샌. 2019. 1. 31. 17:09

위고의 <레 미제라블> 2권에는 파리에 있는 봉쇄 수녀원 얘기가 나온다. 장발장이 자베르 형사를 피해 은신한 곳이다. 봉쇄 수녀원은 '봉쇄'라는 이름 그대로 외부와 단절된 곳이다. 더구나 남자는 절대 접근 금지 구역이다. 그래도 수녀원을 운영하자면 남자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이 봉쇄 수녀원에는 정원사와 잡일을 겸하는 유일한 남자가 산다. 포슐르방이라는 노인으로 절름발이다. 장발장은 전에 포슐르방의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도움을 받아 수녀원에 피신할 수 있었다.

 

정원사 노인은 발목에 방울을 달고 있다. 그가 움직이면 방울 소리가 난다. 수녀들은 방울 소리가 나면 얼른 숨는다. 정원사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다. 남자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정원사의 방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 피하시오' 라는 경고 신호다.

 

어린 시절 들판에서 놀 때 가끔 방울뱀을 만났다. 방울뱀은 꼬리를 곧추세우고 흔들며 "따르르르" 하는 방울 소리를 낸다.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음이다. 뱀만 만나면 쫓아가서 죽였던 개구쟁이들도 방울뱀은 무서워했다. 잘못해서 물리면 거의 즉사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경고음이 무척 고맙다. 수녀원 정원사의 방울 소리도 이와 비슷하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 준다.

 

봉쇄 수녀원의 수녀들은 침묵 속에서 고행과 기도의 삶을 산다. 대부분 소녀 때 수녀원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긴 수련 수녀 과정을 거쳐 정식 수녀가 된다. 청빈과 순명, 거친 잠자리와 음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엄청난 의무가 부과된 감옥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수녀들이 그 안에서 무슨 죄를 짓겠냐마는,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속죄 기도를 바친다.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여 치르는 기도다. 폐쇄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미치게 되는 수녀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이 정도면 광기와 신심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위고는 봉쇄 수녀원을 길게 소개하며 비인간적인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유럽에서 봉쇄 수녀원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지원자가 아예 없다. 위고가 살았던 19세기 중반까지도 이런 신앙의 엄격함과 치열함이 남아 있었다. 정원사의 방울이 상징하는 것은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 넣는 극기의 다짐이다. 백척간두에 자신을 세우는 서릿발 같은 기상이다. 그분이 부르시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있다.

 

현대인은 신앙마저도 주말의 취미 생활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기희생이나 비움의 가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레 미제라블>에서 '정원사의 방울' 부분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나 자신을 돌아보아도 사는 게 너무 설렁설렁이다. 억만금을 준대도 버리지 않을 나만의 가치 기준이 있는가? 치열하게 지키고 싸워나가야 할 푯대가 있는가? "딸랑딸랑" 정원사의 방울 소리는 나태한 내 영혼에 대한 경고의 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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