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F90X

샌. 2008. 11. 29. 17:41

히말라야 트레킹을 간다고 하니까 옆의 동료가 슬라이드 필름까지 주면서 꼭 필름카메라를 가져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렌즈 효과라든가 색감이 슬라이드가 훨씬 낫다는 것이다.그는 아시아 대륙의 오지를 단신으로 거의 다 섭렵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다. 원래 내 생각으로는 그저 작은 디카만 하나 가져갈 계획이었다. 이번 트레킹에서는 사진보다는 오로지 히말라야의 품에만 안기고 싶었다. 사진을 찍느라 이리저리 마음을 뺏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달리 생각해 보니 히말라야 설산의 멋진 풍광을 그냥 지나치고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다면무척 아쉬울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이왕이면 동료 말대로 작은 디카보다는 넓은 범위가 커버되고 화질이 좋은 큰 카메라가 나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창고에 있는 카메라 가방에서 예전에 썼던 필름카메라를 찾았다. 나는 니콘을 주로 썼는데 현재 바디가 세 개 남아 있다. FM, F3, F90X인데 디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용하던 기종들이다. FM은 천체사진을 찍는다고 중고를 샀고, 나머지 둘은 신품을 사서 아쉬움 없이 사진을 찍었다. 그중에서 F90X가 마지막에 가장 많이 사용한 나의 애기(愛機)였다고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손때 묻은 옛 카메라를 만지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놈을 들고 산과 들로 쏘다녔던 기억도 새로운데, 디카와는 다른 묵직한 느낌이며 힘찬 셔터 끊어지는 소리가 고향을 찾은 것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거기에 필름 감기는 소리까지 더해지면 마구 심장이 뛰지 않을 수가 없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라고 할까,인간 정서의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필름카메라에서는 느껴진다. 내가 아날로그 세대여서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분명 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아날로그는 디지털보다 훨씬 더 따스하고 인간적이다.

F90X를 손으로 만져보면서이번 트레킹에는 이놈과 동행하기로결정했다. 필름도 가져가야 하고 카메라가 무겁고 부피가 나가는 등 불편한 점이 많지만 왠지 히말라야에는 이놈을 데려가고 싶어졌다.렌즈는 시그마의 18-35 하나만 달고 가려 한다. 좋은 사진을 만들 욕심보다는 옆에 손때 묻은 옛 친구가 있다면 추운 산 속도 무척 따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번에 히말라야에 가기 위해서 등산 장비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새로 구입하고 있다. 또 함께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오래 사귄 푸근한 옛 친구가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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