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2)

샌. 2008. 11. 25. 12:28


다음 달부터 기여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33 년의 의무 납부기한을 이번 달로 다 채운 것이다. 1975년에 첫 발령을 받고 교직에 들어선 이래 꼭 33 년이 지났는데, 이런 매듭을 만나게 되면 더욱 지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차지하는 33 년의 의미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있었던 자리가 어디였고 지금의 자리가 어딘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옛 앨범에서 33 년 전의 내 모습을 보았다. 갓 스물세 살로 Y여중에 부임했을 때의 사진이다. 막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일과가 끝나면 운동장 한 편에 있던 테니스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두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가 사진을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마 아이는 부끄러워서 겨우 말을 꺼냈을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다소곳하게 서 있고, 한 아이는 용감하게 내 팔짱을 끼었다. 당시의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얌전한 표정과 자세들인데 발랄하기 그지없는 요사이 아이들과는 천양지차가 난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그때 아이들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몇 년 전에 Y여중에 갔더니 옛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 교사가 들어서서 너무 생경 맞게 느껴졌다. 복도의 아이들에게서도 옛날의 그 아이들의 모습은 읽을 수 없었다. 10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간 세 번이나 강산이 뒤바뀔 아득한 시간이 흘렀다. 사진 속의 아이들도 벌써 40대 중반이 넘는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그때 Y여중 시절의 한 제자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라고 할 수 있는 만남이었는데 내 기대와는 달리 제자는 실망스런 모습만 남겨주었다. 차라리 안 만났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과거 기억이라는 것이 대부분 착각인 경우가 흔하다. 사소한 한 부분이 과장되게 저장되어 전체 이미지를 왜곡한다. 내 과거에 대한 향수에도 상당 부분 미화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때의 일기장을 들춰보니 힘들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고생은 도리어 그때가 더 심했던 것 같다.


- ‘난로 없는 교무실이 너무나 춥다. 온 종일 코트를 걸치고 학습 지도안을 정리하다.’

- ‘무슨 사무가 이다지도 많은지 마음과 몸이 편히 쉴 겨를이 없다. 마음의 분주함이 육체를 얼마나 피곤하게 하는지를 절실히 느낀다. 학습 지도안 작성도 하지 못하고 서류 작성에 쫓기다. 상관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 ‘요사이는 출근 때마다 복통으로 고생하고 있다. 하루에도 2, 3회씩 변소 출입을 해야 속이 편안해진다. 이것이 다 마음의 불안정과 연결시켜 생각할 때, 드러나는 육체적인 병보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생활의 리듬을 찾는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진실’이라는 단어는 자꾸만 멀어져간다.’

- ‘하루의 일과를 마쳤을 때 심신이 녹초가 되는 것은 오늘도 마찬가지. 중노동일지라도 이만큼 피곤할까? 대전투를 치르고 후퇴한 패잔병의 심정이 이런 걸까?’


첫 발령을 받은 뒤 처음부터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근무를 시작했다. 한창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시에 교직은 가장 인기가 없는 직업이었다. 현장에서는 고급인력이 부족했고 교사들 중에서도 능력이 있다는 사람은 재주껏 빠져 나갔다. 교직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당히 박봉이었다. 시대가 변해 지금은 보수도 올라갔고 안정된 직업이라는 이유로 인기가 있지만 당시에 교직에 있다는 것은 자괴감마저 드는 일이었다. 그래선지 교장은 성직 어쩌고 하며 사명감만 강조했던 기억이 안다. 일기장에 이런 내용이 있는 걸 보니 당시 초임교사 월급이 10만 원 안팎이었던 것 같다.


- ‘처음으로 보너스 더해진 월급을 받다. 151809원. 대부분은 신학기 대학원 등록금으로 지출되겠고 여유가 있으면 테니스 도구를 준비해 보고 싶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는 테니스가 좋을 것 같다.’


당시는 용의복장 때문에 교감한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긴 머리도 안 되고, 복장은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어야 했다. 길거리에서도 짧은 치마와 장발을 단속하던 시절이었으니 공무원들이야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에는 아침저녁으로 직원회의가 있었고, 교사들에 대한 교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신출내기 교사는 그게 아니꼬워 일부러 눈에 나는 짓을 하기도 했다. 일기장에는 이런 우스운 내용도 있다.


- ‘머리를 짧게 깎다. 교감선생님이 좋아 하시겠지.’


매월 폐휴지를 거두었고 그 결과는 교무실 칠판에 게시되어 담임 능력과 연결되었다. 장학적금 실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성적은 당연히 신경이 쓰였다. 또 매일 점심시간이면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 도시락 검사를 했던 기억도 난다. 밥도 제 입맛대로 못 먹었던 시대였다. 사진에도 일부 보이지만 학교 건물은 온통 새마을 구호로 가득했다. 고등학교에서는 교련 수업이 있어 학교는 작은 병영에 다름 아니었다. 1970년대 우리 학교의 풍경이었다.


- ‘어제 수집한 폐휴지는 22.5㎏, 장학적금 신청은 124구좌이다. 다른 반에 뒤지지 않는 좋은 실적이었다. 이번에 볼 월례고사는 성적은 어떻게 나타날까?’


지금 되돌아보면 왜 저런 지시를 무시할 수 없었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다른 반에 뒤지지 않으려 나도 똑같이 아이들을 닦달했을 것이다. 과정이나 의미보다 결과를 무지 따지던 시대였다. 그때 있었던 숙직이나 일직, 출근부, 학급일지 등은 지금은 사라졌다. 그래도 아무 문제없이 학교는 잘 돌아간다. 그중에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학급일지는 왜 그렇게 꼬박꼬박 쓰게 했을까? 학급일지에는 담임 지시사항란이 있어 매일 아이들에게 하는 비슷한 설교를 의무적으로 적어 넣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문제가 터지면 면피가 된다고 윗분들은 말했다. 그런 일들에 대해 회의를 하거나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하고 말없이 따르기만 했다.


당시의 일기장에는 차마 드러내기 부끄러운 내용도 있다. 33 년 전의 나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교직을 시작했지만 현실인식은 초라했고 옳다고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했다. 불만은 컸지만 대안은 없었다.


숲 속에서는 숲을 보지 못한다. 시대나 역사도 마찬가지다. 한 시대의 부조리나 모순이 선각자가 아닌 한 동시대인들에게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다. 숲을 떠나야 숲의 전체 모습이 보이듯 시간이 지나야 조금씩 그 시대의 실상이 드러난다. 물론 여기에도 시대적 제약이 있다. 우리는 늘 자신이 속한 시대의 가치관으로 다른 시대를 평가한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비판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옛날보다 얼마나 더 자유로워졌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더 정교하고 은밀한 장치에 의해 구속되고는 있지 않은가 돌아보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30여 년 전이 도리어 단순하고 인간적인 시대였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33 년 뒤면 내 나이는 90의 목전에 이른다. 그때까지 맑은 정신으로 살아있을지 모르지만 33 년 뒤의 내 모습을 그려보려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마치 지금의 내가 33 년 전의 옛 내 모습을 보며 당황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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