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나무

경복고 무궁화

샌. 2008. 9. 10. 16:21



무궁화가 나라꽃이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오래된 무궁화나무가 없음은 아쉬운 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무궁화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백 년 남짓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경복고 교정에 있는 이 정도의 무궁화라면 보기 드물게 크게 자란 것이다. 백단심계의 이 무궁화는 수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품종도 우수하다고 인정을 받았다. 이 정도면 꽃이 아니라 나무 자체에서도 품격이 느껴진다.

 

나무를 하얗게 덮던 꽃들도 지금은 듬성듬성해졌다. 무궁화는 초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석 달 정도 피고지고를 반복한다. 매일 새로운 꽃으로 단장하니 한 나무에서 거의 5천 송이 가까이나 피었다가 지는 셈이다. 예쁜 꽃이 단 하루만 피었다가 사라진다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끊임없이 꽃을 피워내는 그 생명력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무궁화는 첫째, 성을 따진다면 결코 여성이 아니다. 중성이다. 요염한 색채도 없고 복욱(馥郁)한 방향(芳香)도 없다. 양귀비를 너무 요염하다 해서 뜰에 넣지 않는 우리 선인의 취미에 맞을 뿐 아니라, 향기를 기피하며 목서까지 뜰에서 추방한 아나톨 프랑스의 사제(司祭)도 타협할 수 있을 은일(隱逸)의 꽃이다. 그리고 은자로서의 우리의 선인의 풍모를 잠깐 상상한다면, 수수한 베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살부채를 들고 조그만 초당 뜰을 거니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 모습에 잘 어울리는 꽃으로 무궁화 이외의 꽃을 쉬이 상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무궁화는 은자가 구하고 높이는 모든 덕을 구비하였다. 무궁화에는 은자가 대기(大忌)하는 속취(俗臭)라든가, 세속적 탐욕 내지 악착을 암시하는 데가 미진(微塵)도 없고, 덕(德) 있는 사람이 타기하는 요사라든가 방자라든가 오만이라든가를 찾아볼 구석이 없다. 어디까지든지 점잖고 은근하고 겸허하며, 너그러운 대인 군자의 풍도(風度)를 가졌다. 서양 사람들은 무슨 꽃을 겸허의 상징으로 삼는지 즉금(卽今) 잠깐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나는 어떤 꽃보다도 우리의 무궁화가 겸허를 잘 표현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무궁화는 최고의 덕을 가진 탁월한 꽃이라고 찬양할 수 있겠다. 왜 그러냐 하면, 겸허는 사람의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심경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온 땅을 누릴 수 있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 이양하 수필 '무궁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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