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고향에서 지낸 일주일

샌. 2008. 8. 4. 18:42

7/28

혼자 내려가는 걸음은 쓸쓸하다. 고향집에는 아무도 없다. 늘 그랬듯 텅 빈 집이다. 서먹하고 미안하고 허전하다. 가슴으로 찬 바람이 지나간다. 자격지심 탓인지 이번엔따스한 모성이 더욱 그리워진다.

7/29

쉬다. 짬짬이 '쿼크로 이루어진 세상'을 읽다. 화단의 배롱나무 꽃이 환하다.



7/30

걷다. 길 위에 서면 그나마 생기가 난다. 햇볕 따갑지만 두려운 건 그게 아니다. 홀로 걷는다는 것은 철저히 혼자가 되면서 또한 밖으로 자신을 여는행위다.그냥 걷다보면 꽁꽁 닫아놓았던 마음의 울타리가허물어진다. 자책도 원망도 눈 녹듯 사라진다.

기억이란 참 묘하다. 아주 사소한 것이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어느 때 이 길을 따라 오계초등학교 뒷산으로 소풍을 갔었다. 2열종대로 타박타박 걸어갔던 기억이 유난히 남아 있다. 중요한 것 다 놓아두고 하필 봄소풍 가던 이 길이 왜 자꾸 문득문득 떠오를까. 지금은 아스팔트로 말끔히 단장된 그 길 위를 40여 년만에 다시 선다.



천연기념물 느티나무를 보러 단촌리에 들리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한 시간 거리다. 700 년 된 노거수인데 이제야 첫 만남이다. 전에는 고향 부근에 이런 나무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하천길을 따라 영주로 간다.원래 하천은 이런 모양이다. 사람이 제방을 쌓았지만나무와 풀이 자라고 고기가 자유롭게 노닌다. 모든 게 자연스럽다.



지금 하천 전체가 공사중이다. 수해 방지를 위한 하천재정비사업일 것이다. 제방의 나무와 풀은 베어져 시멘트로 대치되고, 하천 바닥도 마찬가지다. 그러다보니 군데군데 둑이 만들어지는데 아래위로 고기가 이동할 수 있게 인공어로까지 만들고 있다. 그 친절이야 좋지만 녹색의 강을 파괴해 놓고는 무슨 사후약방문이란 말인가.저만큼 투자를 할 거면 나무를 심으며 옛 제방을 보강하는 편이 훨씬 나아 보인다.



영주시를 지나는 죽계천을 건너다. 죽계천은더 내려가 낙동강과 합류한다. 다행인 것은 물은 예전에 비해 많이 맑아졌다. 축산 폐수나 생활 오수를 천으로 흘려 보내지 않고 따로 모아 처리하기 때문이다. 흰 모래사장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모습이 정겹다.



집에서 오계, 단촌, 창진을 거쳐 영주까지 약 17 km를 걷다. 시내에서 S 형과 만나다. 이번에 명예퇴직을 한단다. 부럽다. 소나기가 한 바탕 지나가다.

어머니 손목시계를 사다. 치킨을 사와서함께 맛있게 먹다.

7/31

농사에 관한 한 어머니는 프로다. 동네의 남자들도 따라오지 못한다. 그 열정은 어떤 면에서 집착에 가깝다. 밭에 나가보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밭 전체가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무엇이 어머니를 밖에만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아무리 말려도 되지 않으니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산소의 풀을 뽑다가 포기하다. 이번 추석에는 아무래도 벌초 하러 다시 내려와야 할 것 같다.

'장자 평전'을재독하다.

8/1

다시 걷다. 이번에는 마을 뒷길로풍기까지 간 뒤 봉현을 거쳐 돌아오다. 약 10 km 되는 거리다. 소백산 줄기의 능선이 아름답다. 저 줄기를 넘어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죽령, 고치령, 마구령이다.



풍기초등학교에 들리다. 잠시 풍기에 살았을 때 이 초등학교를 1 년여 다녔다.몇 년 전에 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풍기초등학교에 같이 다닌 누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만났는데 영 미안하고 어색했다. 그 친구는 세세한 것까지 얘기하는데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헤어진 뒤 그에게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 몇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 40여 년 전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추억이 사라진 장소는 쓸쓸하다.



8/2

논의 벼들이 만드는 초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감사해지고 가슴이 울컥해진다. 참으로 아름다운 것 앞에서는눈물을 흘릴 수도 있음을 실감한다.



오후에는 고모님과 이모님을 찾아뵙다. 이모님 댁에는 사촌 동생들이 와 있다.

내 감정이 메말라서인가, 사람들과의 만남이 그저심드렁하다. 그들이 즐거워하고 추구하는 것들에 공감할 수가 없다. 나는 고슴도치 마냥 자꾸 움츠러든다.

큰 비 예보가 있었지만 가볍게 지나가다.

8/3

어머니와 밭에서 고추 첫 물을 따다. 따온 고추는 깨끗이 씻어 온전히 햇볕으로 말린다. 어머니를 보면고추를 말리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다. 마당과 비닐하우스를 오가다가 날이라도 궂으면 방안으로 모셔 불을 때야 한다.


대범하다면 좋겠다. 어지간한 일 쯤 허허 웃어넘긴다면 좋겠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그가 충고해 주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스스로 조바심 나고 애가 탄다. 그러나 누구 탓을 하랴. 다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고향이 쓸쓸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쓸쓸한 것이다. 마음은 고향에 의탁하여 자신을 드러내는지 모른다.

8/4

아침 일찍 출발하다. 마음이 납덩이 처럼 무겁다. 이번에는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