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 가신 H 선생님을 만나러 모교에 들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36년 만의 일이다. 모교가 멀지 않은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 교정에 들어가보는데 그렇게 긴 세월이 걸렸다. 그만큼 내가 무심했던 탓일 것이다.
16살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와 여기서 유학생활이 시작되었다. 키 작고 숫기 없는 아이가 생소한 환경에서 적응하는데 무척 고생을 했다는 것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옛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공부에 대한 부담 또한 컸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어려움을 용케도 잘 이겨내었다 싶다. 물론 그 뒤에는 부모님의 뒷받침과 외할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친하게 지낸 경우는 30여년 만에 만나는 데도 불구하고 누군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입학했을 때 시골 출신들이 많이 있어서 서로 비슷한 처지라 마음을 나누기 좋았을 것이다.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그 옛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감회가 깊었다. 묘하게도 기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무척 사소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친구가 수업시간에 책을 읽다가 갑자기 목소리 톤이 변해 왁자하게 웃었던 것 같은 것이다. 그래도 남아있는 기억들은 힘들었던 것보다는 빙그레 미소가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우리 뇌의 기억 필터링 효과에 감사할 뿐이다.
당시와 비교할 때 남아있는 건물은 본관만이고 나머지는 모두가 낯설었다. 강당이나 과학관 건물은 새로 신축되었고 옛날 도서관 건물은 철거되어 사라졌다. 운동장 한 쪽에 있는 작은 동산은 옛날 그대로 모습이어서 자꾸만 눈이 갔다. 이 본관 건물도 내년에는 철거를 하고 새 교사를 짓는다고 한다. 옛날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환경은 말이 아니게 열악했다. 특히 복식 구조라 복도 양쪽으로 교실이 배치되어 있어 마치 감옥 통로 마냥 을씨년스럽고 살벌했다. 옛날 내가 공부할 때와 똑 같았는데 그때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군대 막사도 이보다는 못할 것 같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이런 환경에서 지내야 하는 아이들이 받을 감성의 상처가 두려웠다.
모교는 강북의 낙후된 지역에 위치해 지금은 아주 침체되어 있다. 선생님들이 발령받기를 꺼려하지만가서 근무해 보면 아이들의 순박함에 놀라게 된다고 한다. 같은 서울인데도 경제적 차이에 의해 사는 동네가 다르고 아이들의 심성에도 차이가 있다. 잘 사는 동네 아이들은 말끔하고 귀티가 나지만 대신에 아이들 특유의 순진함은 찾기 어렵다. 부모를 닮아선지 세상 흐름에도 대체로 약삭빠르다. 그리고 아이들과 생활하다 보면금방 느끼는 것이지만 가난한 동네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응어리가 들어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열등감일 수도 있고 시기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어린 아이들에게서 그런 감정을 읽게 될 때는 나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저 건물도 내년이면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교에도 이젠 남아있는 옛 흔적은 거의 없는 셈이다. 내 추억의 감상터가 사라지더라도 후배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들이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의 푸른 꿈을 꽃 피울수 있는 교육 환경이 된다면 더욱 좋겠다.
'사진속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만 피면 뭐 헌다냐 (0) | 2007.04.07 |
---|---|
사당동으로 이사를 하다 (0) | 2007.04.07 |
NO FTA! (0) | 2007.03.28 |
교정의 봄 (0) | 2007.03.26 |
봉달이 화이팅! (0) | 2007.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