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은 8일 동안의 휴일이 주어졌다. 2일과 4일의 징검다리 근무일이 모두 재량휴업일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주와 영주의 처가와 고향집을 모두 다녀올 수 있었다.
어머님을 찾아뵙고 형제 친척들을 만나는 것이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힘들어지는 것 또한 어찌할 수 없다. 긴 거리를 오랜 시간 움직여야하는 몸의 피곤보다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또 병약한 모습의 어른들을 뵙게 되는 정신적 피로함이 훨씬 더하다. 이번 길에도 처가 쪽에서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는 큰어머님과, 본가 쪽에서는 암투병중이신 이모부님을 병원으로 찾아뵈었다. 종이처럼 얇고 창백한 모습에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특히 치매 요양원에 계신 노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나고 병들고 죽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운명이라지만, 그래도 추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명절의 기대와 즐거움은 나에게는 이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명절을 앞둔 스트레스는 여자들만 겪는 것이 아니다. 도로를 가득 메우며 고향을 찾아나서는 저 수많은 차량 행렬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고향길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TV 속 장면이 왠지 시샘이 나고 부럽기조차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다. 송편을 빚기 위해 가족들은 마주앉는다. 각자 빚는 모양새도 다르고 좋아하는 속도 다르다. 어머니는 한 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를 좋아하고, 나는 보름달 같은 모양을 잘 빚는다. 아내는 쑥송편을 좋아해서 그것만 만든다. 그리고 송편 빚는 자리에서 그동안의 고향 소식을 듣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가마솥에서 송편 익는 냄새가 퍼지면 시름에 젖었던 마음도 잊을 수가 있다.
추석은 고향집 고양이에게는 오랜만에 고기를 포식하는 날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던져주는 생선이랑 살코기에 배가 팽팽해진다.
농촌에서는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이다. 차례를 지내고 밭에 나가 고구마를 캐고, 고추를 따며 어머니의 일손을 덜어준다. 그리고 들에서 한 그릇에 비벼먹는 점심은 맛이 일품이다. 고향은 입맛으로 우선 다가온다. 올 추석도 역시 과식은 피할 수 없었다.
고구마를 캐는 조카는 강원도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고3 학생이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래도 인문계 고등학생인데 저렇게 부모를 따라와 밭에서 일을 하는 모습이 대견하고 예쁘다. 어느 집은 고3 뒷바라지해야 한다고 추석에 내려오지도 못한다는데...
저녁에는 논으로 메뚜기를 잡으러 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농약을 치지 않아 메뚜기가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논둑을 걸으면 도망가는 메뚜기 떼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다. 제비도 다시 돌아왔으면 좋으련만.....
가을은 파란 하늘, 노란 들판, 그리고 마당의 빨간 고추다. 인간사는 복잡해도 원색의 가을 색깔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고마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