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화나고 우울할 때

샌. 2006. 5. 30. 12:03

살면서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세상살이가 사람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부득이하게 큰소리가 나오고 마음속에 쌓여있던 불만과 미움의 마그마가 한 순간에 분출한다. 나의 경우 어떨 때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 낸 것에 대한 정당성 여부를 떠나 자신이 그렇게 흥분했다는 사실에 대해 곧 자책감의 밀물이 밀려온다. 상대방보다도 자신이 더욱 미워진다. 이렇게 되면 며칠간 우울한 감정에 시달리게 된다. 규모가 큰 폭발일수록 후유증은 오래 간다.


화나고 우울할 때 조심할 것은 자신의 잘못에만 집중하며 자책하고 자괴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날아간 화살에 너무 아파해서는 안 된다. 화가 일어나면 그 화를 그대로 인정하고 잘 살펴보아야 한다. 미움과 분노를 감추려하거나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불완전하면 불완전한대로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미움이 일어나면 실컷 미워한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며 자연스런 마음의 흐름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게 혼란스런 감정을 풀어놓아주면 마음은 어느새 차분해지고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지만 나중에는 너도 나도 모두 불쌍한 존재라는 사실에 연민이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화나고 우울할 때면 혼자 걷는다. 친구와 술을 퍼마시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시의 위안일 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길은 숲 속의 오솔길이든 도시의 화려한 길이든 상관없다. 도리어 도시의 천변만화한 풍경이 마음의 안정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제는 경복궁과 안국동을 거쳐 종각네거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경복궁 뜰에서 나무와 풀도 살펴보고, 다녀보지 않은 도시의 샛길을 따라 걸었다. 도시의 뒷골목이 의외로 포근하고 따스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렇게 객관적 풍경 속을 아무 의식 없이 걷다보면 뭔가 그립고 따스한 것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타인에 대한 분노나 원망은 소리 없이 풀려 나간다. 자신을 홀로 자유롭게 놓아두며 걸을 때 나는 이런 선물을 매양 받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자기 위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나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원래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원망과 미움의 감정은 강도만 약해졌지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내 주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감정들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다. 그것은 배를 흔들지 못하는 그저 잔잔한 물결일 뿐이다. 물론 미래의 어느 때는 다시 폭풍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때를 지금 염려할 필요는 없다.


화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것은 체제나 가치관끼리의 충돌에서 오는 분노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회의와 분노는 나를 가장 힘들게 한다. 그것은 자극적이고 지속적이어서 사람을 바닥에서부터 갉아먹는다. 아직도 이 분야에서는 조화와 어울림의 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분강개의 지사형이 될 수 없는 나는 은둔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도피는 내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방어기재이다.


다행인 것은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와는 달리 화를 내는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에 대처하는 방법도 나름대로는 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뒤처리가 자학 쪽에 가까웠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하며 스스로를 많이 들볶았다. 상대방에 대한 죄책감으로 많이 괴로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부족하면 부족한대로의 나를 그대로 인정한다. 이기적인지 모르지만 이젠 상대방 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한다. 내가 상대방까지 책임져야 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은 상대방 나름대로의 위로의 방법에 맡긴다. 그것이 역설적이지만 인간과 하늘을 믿는 태도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무척 편해진다.


세상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잘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말했다. 역사는 하늘의 기준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개인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강력하고 순수한 희망을 가지며 진실 되게 사는 것뿐이며, 그 나머지는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직도 하늘보다는 나를 더 믿는 편인 것 같다. 세상을 보는 폭과 깊이가 넉넉하고 여유롭지 못하다.


화나고 우울할 때 그것을 억지로 회피하려고 하지 말자. 우리가 기쁨과 행복을 즐기듯 어떤 면에서는 우리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분노와 슬픔의 감정마저도 즐겨보자. 물론 잘 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천지원수 대하듯 싹마저 문질러버리려고 하지는 말자. 그럴수록 잡초처럼 더 맹렬히 돋아나온다. 분노와 우울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저절로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대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가만히 지켜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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