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닮고 싶은 사람

샌. 2006. 5. 12. 13:59

금년에는 전 직원을 상대로 하는 업무를 맡았다. 일이 힘들 때도 있지만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다. 조급한 사람, 느긋한 사람, 덤벙대는 사람, 꼼꼼한 사람 등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다. 마감 기한을 앞당겨 제출하는 사람도 있고, 늘 기한을 넘겨서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다. 늦는 사람은 대개 항상 늦는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을 접촉하게 되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체로 비판을 잘 하고 불평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하는 일에서는 결코 칭찬받을 만큼 잘 처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가져오는 서류를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하자가 발견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들이 불평하는 그것을 본인이 더 자주 저지르는 것이다. 상대방의 오류를 잘 지적하지만 정작 자신의 오류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묘한 일이다.


K는 타고난 좋은 머리로 세상을 예리하게 비평하며 자주 새로운 것을 깨닫게 해준다. 세상사의 흐름부터 개인의 성격까지 모든 것이 그의 날카로운 비판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유감인 것은 자신에게는 그만큼 엄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내가 볼 때는 그 자신 역시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주식과 부동산 시세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이들을 욕하면서 정작 본인은 큰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대체로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런 이율배반성을 가지고 있다. 남의 눈의 티끌은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밖으로 향하는 비판의 잣대를 안으로 돌린다면 세상의 모순에 앞서 내 자신의 모순을 더 빨리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맡은 업무를 중심으로 볼 때 큰 소리 치는 사람일수록 실속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이 말하는 그만큼 본인은 실천하지 못하면서 다른 데서 핑계를 찾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옛말을 빌린다면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이고, 빈 수레일수록 요란한 것이다. 익은 벼나 빈 수레라는 표현은 한 인간이 가지는 내적인 조심성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차이를 인정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다 비슷하다. 익은 벼라고 해서 특별한 알이 들어차있는 것이 아니고, 빈 수레라고 해서 유별나게 텅텅 비어있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인간은 수시로 변할 수 있고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다만 안이 익었든 비었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조심성이다. 조심성 있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분명 어떤 차이가 있다. 그 점이 개인의 인격을 결정한다고 본다.


함부로 사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조심스럽게 사는 모자라는 사람이 낫다. 그들이 비록 사회의 주류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세상은 이만큼이라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나중에 평가될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을 이루었느냐나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사는 동안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았느냐,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선물에 감사해하고 다른 존재의 선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 큰소리 잘 치고 당당하고 잘난 사람보다는, 못나 보이지만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사는 사람들에 훨씬 더 신뢰가 간다. 또한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요사이 하는 일을 통해 여러 사람들을 접촉하며 이런 사실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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