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400 : 15

샌. 2006. 4. 19. 15:15

웃음을 연구한 사람에 따르면 다섯 살 정도 되는 어린이는 하루에 평균 400 번을 웃는데, 성인은 고작 15 번밖에 웃지 않는다고 한다. 이 통계를 보면 사람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웃음을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불행하다.


나 자신을 돌아보니 아무리 잘 봐 주어도 성인의 평균이라는 하루에 15 번 정도도 웃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도 대부분이 미소의 형태이고 얼굴 근육을 사용하는 파안대소는 거의 없다.

여성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것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웃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모인 곳에서는 대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대신에 수다 소리를 참아야 하는 불편도 있지만 깔깔 하고 웃는 여성의 웃음소리를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기분 좋게 만든다. 여성의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많은 것은 아마도 이런 웃을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여대생으로 보인 두 젊은 여성이 서로 얘기를 나누며 쉼 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경탄한 적이 있었다. 아마 학교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데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거렸다. 웃느라고 얘기를 잘 못할 정도로 거의 5 초에 한 번씩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나 다 겪는 평범한 일상에서 이렇게 웃음을 만들어내는 마음이 나에게는 무척 부럽고 경이로웠다.


확실히 신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노인보다는 젊은이에게 웃음의 선물을 더 주신 것 같다. 하루의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나로서도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접할 때면 생명의 밝음에 경탄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아이들은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작은 일들에서 재미를 낚고, 즐거움을 만들고, 그리고 웃는다. 그들을 보면 어떨 때는 삶은 놀이처럼 즐거워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라고 해서 살아가는 일이 힘들거나 고민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활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는다. 고민은 하나의 고민일 뿐 곧 다른 곳에서 기쁨을 발견한다. 이런 특징은 어린이로 내려갈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웃을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은총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선물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웃어본 일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노인의 얼굴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요사이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을 한다. 그런데 성인들의 얼굴은 대부분이 무표정하고 일부 사람은 화가 난 듯 잔뜩 찌푸리고 있다. 삶에 지친 모습이 그대로 얼굴에 나타나 있어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지어보려 애쓰지만 수십 년간 사용 안한 근육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나도 전에는 세상의 짐을 혼자 다 짊어진 듯 딱딱하고 굳은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어떤 사람이 나를 지칭하면서 “거 왜 인상만 쓰고 다니는 사람 있잖아.”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 내 인상이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 인상이 좋고 부드럽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으니 그때에 비하면 많은 발전을 한 셈이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을 즐겁게 만들지 못하는 온갖 걱정거리란 것들 대부분이 지금 내가 여기서 심각히 고민하고 인상을 써야만 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중 많은 것들이 괜히 쓸데없는 고민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일지 모른다.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것은 걱정이나 고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다는 것이다. 생각만 바꾸면 웃음거리는 우리들 도처에 무진장으로 널려 있다.


옛날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새의 깃털로 환자를 간지럼 태워서 병을 치료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웃음이 주는 생리적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웃음이 스트레스를 진정시키고 신체적 조화를 찾아준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웃을 때는 아마 행복의 묘약인 엔돌핀도 다량 방출되지 않을까 싶다.

웃음은 행복을 찾게 해 주고, 행복해진 마음은 더 많은 웃음을 유발한다. 웃음과 행복의 순순환 안에 우리를 둘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멋져질 것이다.


사무실의 직원들을 보면 잘 웃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늘 생글생글 웃는 동료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교실에 들어갔더니 글쎄 아이들이 이래요. ‘선생님은 항상 그렇게 즐거우세요?’”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그분은 참 행복하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사람은 사무실의 분위기까지 밝고 명랑하게 만든다.

대신에 어떤 동료는 늘 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괜히 불편하게 한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삶의 조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알아보면 객관적 여건이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더 나빠서 사람을 찡그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성격 탓이 큰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린아이처럼 잘 웃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동심의 순수한 웃음을 늙어서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마음을 가볍게 가지며 자주 웃으려고 한다. 혼자 있을 때면 일부러 얼굴을 씽긋해 보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억지로라도 웃는 것이 낫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웃음도 연습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못난 점, 부족한 점, 그래서 화나고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일들이 있지만, 대신에 감사하고 고맙게 여겨야 할 일들 또한 그 이상으로 많다. 다만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기고 나에게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없는 것을 새로 가지는 데서가 아니라, 나의 시야를 돌리는 데서 잃었던 웃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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