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입장의 동일함

샌. 2006. 4. 3. 13:20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 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잘 알려진 신영복 님의 글이다.

님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한 '입장의 동일함'이란 과연 어떤 것이며, 그것을 과연 내가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 가끔씩 이리저리생각해 보게 된다.

관찰에서 애정, 애정에서 실천적 연대, 실천적 연대에서 입장의 동일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나와 그것에서 나와 너의 단계를 지나 궁극적으로 하나됨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라는 말을 잘 쓰지만, 입장의 동일함은 그것을 넘어서 완전히 상대방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난한 사람을 돕거나 가진 것을 나누려고 할 때 보통은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일 뿐 나를 내놓는 나눔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고 상하의 위계질서 역시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정심일 뿐 자비심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자비심이란 나를 상대와 똑 같이 낮추어 상대의 슬픔을 직접적으로 공유하고 느끼는 것이다.입장이 동일함은 같은 처지가 되지 않는 한 이를 수가 없다.

비를 맞는 사람에게 일회용 우산을 사주기 보다는 같이 비를 맞아주는 것, 노숙자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하는 것 보다는 같이 노숙자가 되어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이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만이 그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낮아져서 자신을 버리고 이것을 실천한 성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정점이 예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분은 하늘의 높은 자리를 마다하고 손수인간의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신이 하잘 것 없는 인간이 되신 것이다. 엄청나게 큰 신의 사랑만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기독교란 입장의 동일함의 종교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을 버리고 한없이 낮아져야 하는 것 - 물론 지금의 교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는 전혀 별개의 일이자만 말이다.

사실 보통 사람들의 경우는 입장의 동일함이 되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입장의 동일함이 되는 것은 언감생심 불가능하다.

그러나 입장의 동일함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보고 헤아려준다면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살 맛 나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훨씬 더 마음의 상처를 덜 받을 것이고, 또한 사는 게 덜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입장의 동일함을 사람 사이의 관계로만 국한시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현시대에 필요한 것은 도리어 전 생명체로의 사고의 확장이다.

입장의 동일함의 관점에서 생명체를 바라본다면 생명의 가치에 과연 우열을 둘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인간 우월의식 또한 언젠가는 깨어져야 할 우리의 고정관념인지 모른다. 그런 공통된 인식이 있다면 새만금이나 천성산 문제도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의 문제, 요사이자주 들리는 양극화의 문제 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사이의 갈등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헤아려보고 상대방 마음을 살펴본다면 이렇게 심하게 대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집 없는 사람의 아픔을 진실로 헤아릴 줄 안다면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채, 세 채 욕심 낼 마음이 과연 생길 것인가? 내 자식, 내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남이라고 과연 몽둥이를 휘두르고 방패로 찍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이 내 주장, 내 생각을 한 번만 접고 상대편 입장에 설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가정도, 직장도 좀더 따스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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