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때 내가 짝사랑한 여학생이 있었다. 다른 과의 여학생이었는데 일주일에 몇 시간은 공통과목 강의를 같이 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가까이서 얘기 한 번 나누어볼 기회는 없었다. 어떤 계기로 그녀가 눈에 들어오고 끌리게 되었는지는 너무 오래 되어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 사랑의 화살을 맞았다는 것이고, 그 화살이 그녀가 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별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나는 늘 강의실 뒤쪽에 앉았는데 어느 날부터는 강의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항상 앞 줄 가운데에 앉았는데 긴 생머리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몇 달 동안은 자나 깨나 눈에 아른거리며 상대를 못 잊는 사랑의 병을 앓았다. 불면의 밤이 나를 괴롭혔다.
내 소심한 성격에 그녀에게 사랑 고백을 할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내 마음을 자연스레 알아줄 리는 더더욱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설혹 눈치를 챘다 하더라도 그녀의 관심을 끌만큼 나에게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짝사랑의 열병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루 빨리 그녀를 잊는 수밖에 없었다. 포기 외에는 탈출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어느 교수님이 강의 시간에 해주었던 충고가 떠올랐다. 괴로운 짝사랑에서 벗어나려면 상대를 엑스레이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겉으로 어여쁘게 보여도 만약 엑스레이의 눈으로 본다면 상대는 해골에 불과할 뿐이다. 미인대회에서 미녀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며 침을 흘리지만 엑스레이로 본다면 다 똑같은 뼈들의 행진일 뿐이다. 무덤 속에 누워있는 해골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보고 가슴이 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엑스레이 명상을 하기로 했다.
당시에 우리는 전공을 그런 식으로 생활과 연결시키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를 때는 입만 벙긋거리며 지금 초음파로 노래를 했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노래를 못 부르는 나는 초음파 핑계를 대며 상황을 모면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계속 써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여튼 엑스레이 명상이 효과가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해골을 상상하더라도 앞에서 걸어가는 아리따운 그녀의 허리가 찰랑거리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내 세포를 흔들어 놓는데 어찌 그녀의 사랑스러움을 죽일 수 있었겠는가. 도리어 애를 쓰면 쓸수록 괴로운 사랑의 늪으로 점점 더 빠져들 뿐이었다. 아마도 엑스레이 명상은 수도승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지, 당시의 젊고 철모르던 나에게는 애당초 무리였을 것이다. 의식은 엑스레이 총을 손에 쥐어주지만, 무의식은 방아쇠를 당기지 말라고 명령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손 한 번 잡아보고 싶은 욕망과 사랑의 환상에서 나는 계속 허우적댔다.
친한 친구 Y도 당시에 나와 비슷하게 다른 과의 여학생을 짝사랑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때 우리 과에는 여학생 동기가 한 명도 없었다. 시험을 볼 때는 응시한 여학생들이 몇 명 있었는데 모두 낙방한 모양이었다. 만약 한 명이라도 합격했다면 공주 이상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둘은 똑 같은 외기러기 신세를 한탄하며 소주로 속을 달래곤 했다. 그런데 친구는 몇 달간 애를 태우더니 마침내 용기를 내어 상대에게 직접 사랑을 고백했다. 장소는 캠퍼스 안에 있는 우리가 휴식할 때 자주 가던 동산의 나무 밑이었다. 나는 멀리서 가슴 조이며 나란히 앉아있는 둘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퇴짜였다. 아마 완곡한 거절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뒤에 본 친구의 상심은 나를 더욱 아프게 했다. 재도전할 기력도 상실한 듯 보였고, 다시는 친구 앞에서 그녀의 얘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으며 날을 보냈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나도 내 짝사랑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내 처지도 친구와 꼭 같았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그동안의 엑스레이 효과가 보태졌는지도 모른다.
용감한 자만이 사랑을 얻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 말이 진실임을 현실에서 확인할 때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그리고 귀엽고 아름다운 여자가 멧돼지 같이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남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는 것만큼 속이 상하는 일도 없었다. 여자들은 분명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멧돼지의 콧바람만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정글의 동물이었다면 나에게는 평생 짝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한 때의 짝사랑이었던 그녀를 근 30년 만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엑스레이를 그렇게 맞고서도 그녀는 건강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동기라며 짧게 악수를 했다. 그녀의 옷자락이라도 스치고 싶어 노심초사 애를 태웠던 그때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이제 무덤덤하게 손을 잡은 것이다. 나는 속으로 속삭였다. “내 사랑.” 아마 그녀는 짧은 악수 속에 이런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신이 약속을 지킨 것은 고마우나, 그러나 너무 때가 늦어버렸다. 이젠 굳이 엑스레이를 동원하지 않아도 아무 염려 없을 그런 나이가 되어서야 짝사랑의 손을 허락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