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저항권포기죄

샌. 2005. 11. 16. 12:43

'오마이뉴스'에 초등학교를 정년 퇴임하신 어느 분의 이야기가 실렸다. 이 분의 소신있는 생각과 삶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촌지를 받아 처먹었으니 뇌물수수죄요. 내 고향 광주가 전두환 일당에게 칼질 당할 때 멀리서 보고만 있었으니 군부 학살행위 방조죄요…"


지난 8월말 초등학교 평교사로 정년퇴임한 노형근(64·전 안산성포초등학교 교사)씨는 교육인적자원부가 수여하는 녹조근정훈장을 받을 자격이 됐지만 거부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죄인이 무슨 포상이랍니까?" 그가 훈장을 거부한 이유다.

최근 12·12 사태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과 관련, 유죄판결을 받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81명 전원에 대해 훈·포장을 치탈하는 작업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때문에 노형근씨의 훈장 거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간단치 않다.


그가 말하는 첫 번째 죄는 촌지를 받은 것이다.

"62년 처음 교직을 시작할 당시 중학교 입시제도가 있어서 많은 초등 교사들이 과외수업을 했다. 나도 했다. 사실상 불법과외로 벌어들인 부수입이다. 또 당국의 묵인하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용지대'를 받았다. 시험 보는 비용이라고 하지만, 그게 다 그 비용이겠나. 역시 교사들의 부수입이다.

촌지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였다. "(학부모들이) 촌지를 막 가져다줬고, 나도 받았다. 촌지가 좀 수그러든 게 이해찬 총리가 교육부장관 할 때다. 이해찬 총리가 학부모 단체와 함께 단속을 했고, 두 명의 교사가 촌지를 받았다고 사표를 냈다. 그런데 촌지 받은 게 두 사람 뿐인가. 누가 이 사람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다 죄인인데…."


그는 60년대 교사를 비롯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원인이 박정희 정권에서 기인한 것으로 봤다. 박 전 대통령이 정권유지를 위해 야당과 재야·학생운동 세력만 철저하게 통제했지 공무원들이나 교사들은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받아먹으라는 식으로 방치했다는 것. 특히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 유지 및 3선 개헌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선 교사들까지 선거운동에 동원했다고 그는 개탄했다.

"63년, 67년 대통령 선거 때 교육청에서 지시가 왔다. 단축수업을 하고 박정희씨 유세장에 모이라는 것이다. 참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학교별로 표시한 모자를 쓰고 오게 했다. 교육청에서는 교장들을 모아놓고 일선 선생들에게 선거운동 시키게 했다. 유신헌법이나 3선 개헌 때도 단축수업을 한 뒤 직접 가정학습을 나가서 학부모들에게 3선 개헌을 해야 한다고 홍보하고 독려했다. 그렇게 다닌 것을 매일 학교에 보고까지 했다. 심지어 71년 대선 때는 학부모들의 정치성향 조사까지 하라고 했다. 그게 당시 선생이 할 일이었다. 나도 했다. 그러니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나."


73년 유신헌법 찬반 투표 때 참관인을 하다 부정선거를 위해 쫓겨났던 일까지 겪은 노형근씨는 교사에 회의를 느끼고 그해 10월 학교에 사표를 냈다. 막상 나와 보니까 일반 사회도 썩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78년 임용고시를 다시 봤고, 79년부터 서울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했다.


노씨 뇌리에서 아직도 떠나지 않는 죄는 촌지를 받은 것도, 박정희 정권의 선거운동을 해준 것도 아니다. 노씨는 고향 광주가 1980년 5월 피로 물들 당시 서울에서 마냥 지켜만 봐야 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군부 학살행위 방조죄'라는 죄명을 만들어 자신을 다그쳤다.

"80년 5월 17일 뉴스를 보니까 김대중씨를 내란음모와 학생데모를 조종했다는 이유로 잡아갔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믿었다. 그런데 3~4일 뒤 우리 집사람이 집안 일로 광주에 내려갔다가 3일 후 간신히 빠져 나와서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총을 든 민간인들이 아버지 집에 숨어들어오고…, 광주가 심상치 않다고 하더라. 그때 광주에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그럴 때가 아니니까 관망해 보자'며 만류했다.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 내 고향 광주가 이렇게 피를 흘렸는데, 피를 흘린 것까지는 좋은데 폭도라고 누명을 쓰지 않았나. 왜 광주를 제물로 삼아서 정권 탈환을 하느냔 말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국군보안사령관 자격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노태우 전 대통령도 같은 해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을지무공훈장을 받는 등 두 전직 대통령은 각각 10개의 훈장을 받았다. 이에 대해 노씨는 "같은 민족을 죽여 놓고 훈장을 받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흥분했다.

"자기들 세계에서는 그게 공적이니까 받았겠지만 이젠 세월이 지나서 모든 사람이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나. 그럼 훈장을 박탈해야지. 그 당시 공적이라고 받았을지 모르지만 정권 찬탈을 위해 광주사람들을 학살한 행위의 앞잡이가 분명하지 않느냐."


그의 네 번째 죄명은 '저항권 포기죄'다. 지난 40년간 교육계가 정권 담당자와 언론으로부터 동네북마냥 얻어맞고 노리개처럼 희롱당해도 저항 한번 못했다는 게 이유다.

"정권을 잡으면 항상 공무원과 교사를 휘어잡았다.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운동 차원에서 부정부패한 선생을 잡아낸다고 의무적으로 학교에 배정을 했다. 선생이 50명이면 2명은 무조건 자르라는 식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촌지문제로 닦달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촌지문제와 함께 고령교사, 무능교사 퇴출 문제를 제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히 교육자를 핍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 자체가 교육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까 교육자 출신도 아닌 사람을 교육부 장관에 앉혀놓고 밀어붙이기나 하고 있지 않나. 언론도 교사 한 명이 잘못하면 대서특필해서 교육계 전체 문제로 부각시키지만, 검사나 군인 등 권력기관에서 잘못하면 개인 문제로 끝냈다. 정권 잡은 사람 중에 교육자 안 흔든 사람이 없었다."


훈장을 거부한 마지막 이유는 자신이 '잠재적 예비 죄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청백리상'은 본인이 죽고 후손에게 추서했다. 살아있는 동안은 항상 죄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을 때는 또 어떤 잘못을 저질러 그 상이 추하게 될지 모른다. 오웅진 신부 같은 사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했나. 그러나 나중에 비리에 연루됐다. 나도 '잠재적 예비 죄인'이다."


자신의 '죄' 때문인가. 후배 교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노씨는 "너희들은 진리가 아니면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더불어 교육대생들에게도 한 마디 덧붙였다.

"왜 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그렇게 혈기 왕성하더니 교육현장에만 나오면 2~3년 뒤 모두 보수화 되는가. 교육대생들은 학교에서부터 교육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그는 또 '청렴결백'과 '소신'을 강조했다. 그의 소신이 두드러졌던 일화. 지난 2002년 5월 운동회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안성시장이 학교에 왔고, 교장이 시장의 축사를 들어야 한다며 운동회를 중단시켰다. 그는 당장 연단으로 달려갔지만 주변에서 말렸다. 그날 저녁 그는 안성시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띄웠다.

"…고사리 손, 발에 흥이 나서 운동장을 힘차게 도는 등 무르익어가는 경기를 중단하고 축사를 하신 것은 문제가 있지요. 예컨대 전국체전 때 대통령이 자기 멋대로 개회식에 참석 안하고 경기가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와서 경기를 중단시키고 축사를 했을 때를 연상해봅시다.…"


그는 훈장만 거부한 게 아니다. 40여 년간 지켜온 교단을 떠나면서 학교에서 주최하는 퇴임식조차 부담이었다. 그는 정년을 채우기 하루 전날인 8월 30일에도 학교에 나가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평상처럼 수업을 하고, 아이들의 숙제를 검사하고, 정확하게 오후 4시 30분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퇴임식뿐 아니라 정년을 앞둔 교사들을 위해 학교에서 보내주는 '위로출장'이라는 여행도 가지 않았다. 정년퇴임 전 3개월의 유급 휴무가 주어졌지만 이마저도 포기했다. 38년 1개월의 교직생활, 퇴임하는 순간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것이다.

"퇴임식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비용을 들여 해주겠다는 것을 거부했더니, 우리 자식들이 돈을 모아서 동료교사, 학부모, 지인, 친척들을 초청해 '퇴임 및 출판기념' 연회를 열어줬다. 서운치 않다. 그날 우리 후배들이 '선배 고생했다'고 헹가레를 쳐주더라. 하하하."


거실을 둘러보니 벽 한복판에 초등학교 2학년 손주가 그려준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넉넉해 보이는 그의 미소를 사진으로 박아 놓은 듯 똑같이 그려놓았다.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훈장은 거부했는지 몰라도 이미 그의 집 구석구석에는 그가 받은 수많은 훈장이 고스란히 걸려 있었다.'

-----------------------------------------------

이 분이 말한 과거 고백은 나에게도 전부 해당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며 적당히 불의와도 타협하며 살고 있지만, 이 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차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차이다. 아는대로 믿는대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를 알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비웃거나 위협할지라도 자신이 믿는 것을 당당히 지켜낼 용기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고치고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일은 더욱 어렵다. 국가가 주는 훈장을 거부하고, 정년 퇴임식도 사절하고, 위로 휴가까지 사양하며 마지막 날까지 아이들과 함께 교단을 지켰다는 것은 말하기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많은 이들로부터 별난 사람이라는 핀잔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소신대로 행한 이 분은 조무래기들만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작은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죄란 법을 어기거나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양심과 의(義)에 관한 문제이며,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살았는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물론 바른 현실 인식과 제대로 된 역사 의식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치열한 삶이란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가에 대한 자성과도 연결된다.

이 분의 말씀 중에 '저항권포기죄'가 특히 눈에 띈다. 내가 살아오면서 알면서도 불의에 침묵하고 눈 감은 것을나중에 신(神)은 용서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인식하고 감당하며 살기가 사실 얼마나 어려운가? 정의라는 이름을 빌린 단순한 만용도 있을 수 있고, 어떨 때는 침묵이 최상의 저항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노라면 산다는 것이 무척 조심스러워진다.이 분은 끝에서 청렴결백과 소신을 강조했다. 눈을 아래로 내려 옷깃을 여미고 좀더 진지하게 살도록 노력해야겠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익과 진실  (0) 2005.11.30
조심스레 살기  (0) 2005.11.24
짝사랑과 엑스레이  (0) 2005.11.10
한 장의 사진(3)  (0) 2005.11.05
세월이 빠르다  (0) 2005.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