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 퇴직을 하고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을 때 십중팔구 사람들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내려가서는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낼 계획인가요?”
그러나 아직껏 묻는 사람이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할 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그냥 텃밭이나 가꾸며 지내겠다는 말로는 누구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직업으로서의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고,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 치여 못 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누구나 일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에 대한 집착은 그 이상으로 강해 보입니다. 꼭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사람들은 일이 없으면 삶 자체를 견뎌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은 일중독증의 증상입니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은 휴가마저 무언가로 잔뜩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일에 쏟는 열정과 관성이 여가 시간조차 일 처리하듯 바쁘게 지내야 제대로 휴가를 보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고 보니 휴가조차 계획하고 실행하고 하는 과정이 일 처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대인은 자기 혼자, 일 없이 지내는 시간에 길들여 있지 못합니다. 어쩌다 아무 일 없는 시간이 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의 아이들이 이곳에 내려오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TV와 컴퓨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만 아니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외적 자극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아무 할 일 없는 조용한 밤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심지어 책읽기도 너무 조용하면 잘 안 되는가 봅니다. 물론 익숙함의 문제이겠지요.
사람에게 일은 중요하지만 일의 진정한 가치는 도피처가 아니라 자기완성을 향한 수단이라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생존 차원으로서의 일에 매달리느라 자신과 세계의 의미를 묻는 내적 성찰의 기회를 앗기고 있습니다.
물론 도피처로서의 일과 자기완성으로서의 일을 나눌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두 요소가 공존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일의 개념은 점점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고 지낼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이겠지요. 그들에게 적당한 노동 후 남는 시간이면 책도 보고, 바람소리도 듣고, 그리고 물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짧겠다고 하면 공허한 이상주의자라고 놀릴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예언이 맞아서 무료한 시골생활에 따분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시골행을 얘기할 때 맨 먼저 일을 떠올리는 사람보다는 “그래, 이제 너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으니 축하하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로부터 자유선언을 할 수 있는 친구가 그리워집니다.
언젠가 읽었던 박이문님의 글은 이런 저의 생각과 꼭 일치합니다.
아마 은퇴에 대해서 쓴 글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 한 부분을 옮겨 봅니다.
‘놀랍게도 그들의 대답은 의외로 너무 간단하다. 은퇴하면 할 일이 없어지는데 할 일이 없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대답은 언뜻 생각하기에 우리의 상식에 배치된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하면 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놀고 싶어 하며, 일을 꼭 해야 한다면 일 자체가 귀중하거나 즐거워서가 아니라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역설적이지만 맞는 것 같게도 생각된다. 은퇴가 아침에 일정하게 나갈 곳이 없고, 직장에서나 술집에서 함께 떠들며 서로 마음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집안 방구석에서 하루 종일 혼자 할 일없이 앉아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저주스럽다.
그러나 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은퇴를 두려워하고 저주로 생각하는 것은 수단으로서의 일과 자아실현으로서의 일, 자기 망각으로서의 행복과 자기 발견으로서의 행복을 혼동한 데 기인한다. 은퇴로 없어지는 일은 삶의 수단으로서의 일이지 삶의 목적으로서의 일이 아니며, 진정한 행복의 조건은 자기 망각을 요청하는 수단으로서의 일에의 종속이 아니라 자기 발견을 마련하는 목적으로서의 일의 창조이다.
특정한 한가지만을 강요하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직장을 떠나서도 할,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은 무한히 많고, 직업적 특정한 성취에서 얻는 행복감보다는 직업으로서의 해방된 자유로운 공간에서만 가능한 실존적 무위의 행복감이 한없이 더 만족스럽다.
그렇다면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즉 그가 혼자 방안에서 조용히 남아있지 못한다는데 있다.”라는 파스칼의 말은 옳다.
은퇴는 더 많고 중요한 일, 즉 조용히 혼자 있어야 하는 일의 시작을 뜻하며, 고통이 아니라 자유이며,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하루라도 빨리 파스칼적 의미에서 은퇴하고, 이미 은퇴했다면 요리점, 골프장, 해외여행 등의 오락을 통한 자기방심, 자기도피의 지속이 아니라 자기와의 진정한 만남과 실존적 대결을 통한 참다운 자유와 행복을 향유해야 한다.
누구나 한번 밖에는 더 살 수 없기에 이러한 ‘일’은 더욱 숙연하게 다가온다.‘
님은 여기서 행복을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자기 망각으로서의 행복’과 ‘자기 발견으로서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행복은 전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아실현이나 인간적 성숙으로 이끌지 못하는 일은 거기에 아무리 몰두하고 기쁨을 얻는다고 한들 그것은 자기 망각으로서의 행복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순간의 마취제로서 단순한 만족감이지 인간의 근원적 행복감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제 후반부 생애는 님이 말하는 ‘실존적 무위의 행복감’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옛 일을 버리고 새 일을 갖는다는 뜻이며, 새 일이란 일 없음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