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곡서원(深谷書院)은 중종 때 문신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효종 원년(1650)에 서원이 건립되어 심곡(深谷)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다.
중앙에 있는 건물이 일소당(日昭堂)인데 강당(講堂)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된다.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조광조는 중종에 의해 등용되어 소격서(昭格署) 폐지, 정국공신 훈공 삭제, 신진인물 등용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개혁 내용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반대파에 의한 정치적 반란인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선생은 전라도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나이 37세였다.
선생은 뒤에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광해군 2년(1610)에는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서원 가까운 곳에 조광조 선생의 묘가 있다.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이씨와의 합장묘다. 묘역 입구에 선조 때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비문을 지었다.
묘 앞은 온통 용인의 아파트 숲이다. 500년 전에 선생은 성리학적 도학정치를 꿈꾸며 강력한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탄핵을 받자 신임했던 중종마저 등을 돌리고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다. 생을 마감하는 사약을 받을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먼 길 가기 어려우니 내 관은 얇게 만들라"라고 부탁했다. 절명시가 전한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근심하기를 집안 근심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이내 충정을 환하게 비추리라
조광조 선생의 묘에서 돌아나올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역사에는 늘 안정을 바라는 세력과 변화를 꿈꾸는 세력의 충돌이 있었다. 이상주의자들의 바람처럼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꿈을 꾸는 사람은 항상 거대한 벽을 대면해야 한다. 설령 혁명이 성공하더라도 개혁 세력은 어느새 보수가 되어 새로운 진보의 저항을 받는다.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며 역사는 발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앞으로도 수많은 조광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개인의 어이없는 죽음은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씨앗이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