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시절에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라는 말만으로도 매력적인 철학자였다. 그의 책을 읽고 세상의 허무함을 자각한 여러 사람이 자살했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옛날 노트를 보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었던 느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고작 스무 살짜리가 쇼펜하우어를 자네라고 부르며 젊음의 객기를 부리는 모습을 흰 머리가 되어 흐뭇하게 바라본다.
1973/9/27
Arthur Schopenhauer(1788-1860)
Schopenhauer에 대한 선입감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독특하고 쓴 웃음이 나오는 묘한 감정 말이다. 처음 그의 저서를 대할 때는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높은 산을 정복하기 전의 알피니스트의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그의 思想에 젖어보고 싶었으며 특출한 그의 재능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일생을 眞理로만 살았다고 자부하는 孤獨한 哲學者, 그의 厭世主義的인 강열한 思想은 논문집에 잘 표현되어 있다. ‘生存 虛無論’ ‘自殺論’에서 엿보이는 그의 면모는 예상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主著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를 읽고 있는 지금 그의 思想의 원류도 역시 Kant이며 Kant의 思想을 능가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음은 기대 밖의 일이다.
‘純粹理性批判’을 읽던 때의 지루하고 땀을 빼던 어려움. 그러나 Schopenhauer의 思想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는 Kant를 위한 입문서의 역할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즉 Kant 思想을 쉬운 말로 열거해 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Nihilist인 Schopenhauer의 독특한 思想도 곧 발견될 것으로 믿는다. 그의 예지가 번득이고 그의 哲學이 빛을 발하는 그러한 章을 읽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닌가?
‘Die Welt ist meine Vorstellung’
1973/10/16
Mr. Schopenhauer 前
안개 속을 걷고 있었오. 젖빛 속의 迷兒는 파란 뱀을 밟아 버렸소. 그도 역시 뱀에게 발을 물리고 말았소. 지금은 그와 뱀이 나란히 안개 속을 걷고 있소. 迷兒가 뱀에게 말했소. “그대 친구여! 우리 푸르른 강물을 찾으러 달리자” 뱀 曰 “푸른 숲은 나밖에 없다. 너의 푸르름을 나에게서 찾으라!”
"世界는 철두철미 意志와 表象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의 이 命題는 얼마나 魅力的이었던가. 그러나 역시 또 얼마나 난해했던가. 자네는 意志와 表象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겠더군. 나의 物自體를 자네는 意志로 봤네. 그리고 자네는 現象界를 表象에 불과하다고 했지. 자네와 나는 처음부터 의견을 같이하고 들어간 거지. 결국 자네 思想의 핵심은 意志의 無目的性에 있다고 해석했네.
人間 신체나 現象은 동일한 意志가 객관화한 表象에 불과하다. 나는 意志이고 表象일 뿐이다. 자네는 경험적으로 意志와 理念을 만병통치식으로 사용하여 現象을 너무나 잘 설명했네. 허나 자네의 그 특출한 意志가 경험적인 적용을 받는 통에 입은 수많은 상처를 나는 보았네. 意志 자체는 목적도 없고 한계도 없다! 고로 意志의 객관화인 모든 存在는 無目的과 虛無의 惡循環만을 계속한단 말인가?
자네는 또 意志의 동일성이라는 관념하에서 모든 사물의 내적, 외적 합목적성을 추출했네. 그리고 모든 개체에게는 상호 鬪爭을 意志의 본질로 삼았네. 무생물, 식물, 동물, 인간 이러한 순으로 意志의 객관화의 단계는 고급화한다. 가장 단순한 意志의 표현은 일반적 힘으로서 重力이었네. 가장 단순한 형태의 生物 意志는 식물에서 발견할 수 있겠지. 아무 의식도 없이 단지 생장하려는 意志만이 가장 정직하게 표출되고 있으니까. 물론 각 구성 성분도 理念의 부분이지만 그것들은 서로간 내적 합목적성으로 결부되어 있지. 동물의 경우엔 행위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며 최정점인 人間인 경우는 각 개인의 성격과 理性이라는 무서운 것이 있네.
내가 意志라면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네는 意志를 근거율로 부터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그 원인의 탐구를 부정했지. 물론 意志가 物自體인 이상 당연한 논리겠지. 무조건적이고 목적 없는 意志인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외적 합목적성으로 세계는 새로운 무엇이 창조된다고 변화하지도 않을 것이고 무한의 時空 속에서 지속된다. 단지 나는 意志의 表象일 뿐이다.
幸福이 무슨 소린가? 나는 虛無와 倦怠 속을 헤엄치고 있지 않는가? 生命 자체의 價値조차 부정되고 마는군. 자네를 경탄과 회의의 눈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네. 자네에게서 배우기만 한 것이 유감이지만 언젠가는 자네를 깨워 내가 조금만 가르쳐 주겠네.
40년 만에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다시 읽었다. 원 제목은 <소품과 부록>으로 철학적 냄새가 덜 나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제일 많이 읽힌 책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쇼펜하우어답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가 행복을 말하는 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실제 쇼펜하우어는 재기 넘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다.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연애도 여러 번 하면서 인생을 즐긴 현실주의자였다. 그에 대해서는 오해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쇼펜하우어가 세상의 본질이 허망하고 무가치하다고 본 건 사실이다. 인생이 고해(苦海)라는 불교적 세계관과 흡사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존을 위한 맹목적인 의지만이 있다. 이 의지가 우주를 지배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욕망과 고뇌로 가득한 세계에서 인간은 해탈을 통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의 행복론은 이에 대한 실용적인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조건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가 인간을 이루는 것으로 건강, 힘, 기질, 도덕성 등이 포함된다. 둘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재산과 소유물이다. 셋째는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명예, 지위 같은 것이다. 이 셋 중에서 쇼펜하우어 역시 첫 번째의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건강이다. 쇼펜하우어는 명랑함을 최고의 자산으로 치는데, 명랑함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부나 명예가 아니라 건강이라는 것이다.
행복의 가장 큰 장애는 고통과 무료함이다. 외적인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하층 계급 사람들은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지만,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이러한 무료함을 막아주는 것이 내면의 풍요, 즉 정신의 풍요다.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외부에서 필요한 것은 적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는 비사교적인 사람이 된다고 한다. 인간은 고독에 의해서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바깥에 있는 사물, 즉 소유물이나 지위, 친구, 자식, 사교계 등에 의지해 인생을 향유한다. 정신력이 평범한 수준을 약간 넘어서는 사람은 예술에 취미를 가지거나 실용 학문을 추구한다.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탁월한 사람은 자신의 무게 중심이 완전히 자신의 내부에 있다. 그런 사람은 사물의 존재와 본질을 전반적이고 절대적으로 자신의 테마로 취하고, 그 후에 개인적 성향에 따라 예술, 시문학, 철학을 통해 심오한 견해를 피력하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속물은 이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현실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가치의 기준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행복을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찾는 자는 진정한 행복을 얻기 어렵다. 쇼펜하우어가 보는 세상은 고통이 현실이므로, 인생은 그럭저럭 견디며 사는 것이 필요하다. 고통이 없다는 것이 행복을 재는 잣대다. 그래서 향락을 얻기보다는 고통을 피하는 편이 훨씬 중요하다. 그래서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욕구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은 고약한 상태에 있다. 우리의 존재가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은 것이기에 그것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 그런 사실을 안 사람은 어떤 일이나 상태에도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그러면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얻고자 열렬히 애쓰지 않을 것이고, 어떤 일을 그르친다고 크게 탄식하지도 않을 것이다. 욕구하지 않는 삶은 노자의 무위(無爲)를 닮았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정신의 절대적 우위, 고독의 찬양, 세상적 가치의 폄하 등 특별한 데가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비관주의자,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의 다른 면을 발견할 것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세상은 고해(苦海)'라는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사고가 깔려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행복을 자신의 내면 외의 다른 데서 찾지 마라. 주체적인 사고를 하는 당당한 인간이 되라. 온갖 권위나 편견, 상식이나 명령에 묵묵히 복종하는 우매한 민중이 되는 걸 거부하라는 것이다.
행복론에 나오는 몇 대목을 옮긴다.
무대 위에서 어떤 사람은 제후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고문관 역할을, 또 어떤 사람은 하인이나 병사 또는 장군 등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러한 차이는 단지 외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현상의 핵심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똑같이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가련한 희극 배우에 불과하다. 인생도 이와 마찬가지다. 지위와 부의 차이에 따라 각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행복과 즐거움의 내적인 차이가 결코 그런 역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도 한 풀 벗기고 나면 궁핍과 고통에 시달리는 가련한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다.
재기 있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도 자신의 사고와 상상력으로 커다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지만, 둔감한 사람은 번갈아 가며 사교나 연극, 소풍이나 오락을 계속 즐길지라도 고통스러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선하고 온건하며 부드러운 인격을 지닌 사람은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할 수 있지만, 탐욕스럽고 시기심이 많으며 사악한 성격을 지닌 사람은 아무리 부유해도 만족하지 못한다. 하지만 비범하고 정신적으로 탁월한 인격을 한결같이 지닐 수 있는 자에게는 일반 사람이 추구하는 향락의 대부분이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우며 성가신 것에 불과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중대한 재난이 아닌 경우라면, 살면서 인간에게 일어나고 닥치는 일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느끼는지, 즉 모든 면에서 감수성의 종류와 강도가 문제되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이고 실제적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다.
명랑함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건강이다. 하층 노동 계급, 특히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은 명랑하고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부유하고 고상한 사람들은 흔히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명랑함이 활짝 꽃피어 나도록 무엇보다도 높은 수준의 완전한 건강을 유지하려 노력해야겠다.
재기 있는 인간은 무엇보다 고통이 없는 상태,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상태, 안정과 여유를 얻으려고 애쓸 것이다. 즉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생활을 추구할 것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과 약간의 친교를 맺은 후에는 은둔 생활을 추구할 것이다. 또한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은 심지어 고독을 선택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외부로부터 필요한 것이 더 적어지고, 다른 사람이 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는 비사교적인 사람이 된다. 정말이지, 사교의 질이 양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면 큰 세계에 나가 살아 볼 만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백 명이나 되는 한 무더기의 바보는 한 명의 똑똑한 사람만 못하다.
세상은 궁핍과 고통으로 넘친다. 그것을 면한 사람에게는 사방에서 무료함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게다가 세상에는 나쁜 것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어리석음이 큰소리를 치고 있다. 운명은 잔혹하고 인간은 가련하다. 이러한 세상에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행복은 마음의 안정과 만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명예욕이라는 동기를 합리적인 한도로 억제해서 지금의 50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즉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몸속의 가시를 빼내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대부분의 견해는 그릇되고 불합리하며, 이치에 어긋나고 터무니없는 것이므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음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최고의 기쁨이나 향락으로 인생의 행복을 재려고 하는 자는 잘못된 잣대를 잡은 것이다. 향락이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향락이 행복하게 한다는 생각은 질투심이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품는 망상이다. 반면에 고통은 적극적으로 느껴진다. 그 때문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삶의 행복을 재는 잣대다. 무료함이 없어 고통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사실상 지상의 행복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환영(幻影)이기 때문이다.
너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너무 행복해지려는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 세상에는 좋지 않은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 사교다.
고립과 고독에의 경향을 기르는 것은 귀족적 감정이다. 무뢰한은 모두 가엾을 정도로 어울려 지내기를 좋아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보다 고상한 부류의 사람인지 여부는 무엇보다도, 타인과의 교제를 즐거워하지 않고 점점 남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고독을 좋아하는 데서, 그리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고독과 천박함 사이의 선택만 존재한다는 통찰에 도달하는 데서 드러난다.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언제나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오두막이든 궁정이든, 수도원이든 군대든 어디서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삶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험이든, 행운이든 불행이든, 아무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과자와 같은 것이다. 과자의 형태나 색깔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모든 것은 하나의 반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은 만화경 속의 그림과 같다. 돌릴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이는 것 같지만, 눈앞에 있는 그림은 사실 언제나 같다.
스토아적 신조에 의하면 우리는 인간이 처한 상황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무릇 인간으로 생존하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애처로운 일인지, 또 인간이 얼마나 많은 재난에 노출되어 있는지 항상 명심해야 한다. 재난이란 크든 작든 우리 생활의 근본 요소다. 이 점을 항상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 좋다.
성숙한 인간은 무엇보다 사물을 매우 단순하게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청년이나 소년의 눈에는 스스로 만들어 낸 변덕스러운 생각, 인습적인 편견, 기이한 환상으로 이루어진 환영이 진짜 세계를 뒤엎거나 일그러뜨린다. 경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년기에 만들어진 환영이나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노인은 호두껍데기가 아무리 금빛을 낸다 해도 속은 텅 비어 있음을 알고 있다. 노년기에는 피가 냉정해지고 감각 기관이 자극에 둔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의 가치나 향유의 내용을 분명히 알게 되어 전에는 사물에 대한 자유롭고 순수한 견해를 가리고 왜곡했던 착각이나 환영, 편견에서 점차 벗어나, 이젠 모든 사물을 보다 올바르고 분명히 인식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상의 모든 사물이 무상하다는 통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노인은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이러한 마음의 평정은 행복의 커다란 구성 요소이며, 심지어 행복의 조건이자 본질적 요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