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읽은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1984년이 다가올 미래였지만, 지금은 지나간 과거다. 소설에서 그린 것과 같은 1984년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래에 대해 자꾸 비관적이 되는 건 왜일까? 시절이 더 수상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나이가 들어 세상을 더 사실적으로 보게 된 탓일까?
<1984>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개인의 마음까지 당이 장악한다. 오세아니아를 비롯한 세 초강대국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계급사회다. 오세아니아는 맨 꼭대기에 빅 브라더가 있고, 그 밑에 당원이 있으며, 하층의 노동자 계급으로 되어 있다.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지만 이는 공포를 조성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과거를 조작하고, 아예 인간성을 말살하려 한다. 당원들에게는 섹스가 금지되고, 신어를 만들어 사고까지 제한시킨다. 자유라는 단어가 없는데 자유를 꿈꿀 수는 없다.
지배층이 민중을 장악하기 위해 쓰는 수법은 소설이나 현실이나 비슷하다. 사상 경찰, 여론 조작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더 교묘해지고 은밀해졌다. <1984>에 나오는 텔레스크린이라는 무시무시한 감시 기구는 지금의 첩보 위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늘에 떠 있는 카메라로 지상의 일거수 일투족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단지 우리가 얼마나 자세히 감시를 당하는지 모르니 실감이 나지 않을 뿐이다. 벽에 붙어 있는 텔레스크린은 차라리 순진했다.
어쩌면 <1984>는 서서히 실현되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고도로 발달된 과학 기술이 전체주의 독재 체제와 결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1984> 이상으로 참혹할 것이다.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친들 벗어날 길은 없다. 우리는 모두 비극의 주인공인 윈스턴이 될 수 있다. 역사의 흐름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측하긴 어렵지만, <1984>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미래 중 하나다. 인간은 그럴 만큼 우매하다. 오웰이 이 소설을 쓴 것도 인류에 대해 경고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처럼 어디에나 체제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자유를 향한 인간 정신은 어떤 위협으로도 꺾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증오하며 죽는 것, 이것이 자유다." 아무리 포악하고 강력한 정치 시스템일지라도 인간에게는 정복할 수 없는 내면의 정신이 있다. 윈스턴은 무너졌지만 또 다른 윈스턴이 빅 브라더의 가면을 벗기려 나설 것이다.
작금의 정치 상황이 <1984>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건 나의 과민반응일까? 남북 긴장을 체제 유지의 도구로 이용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체제를 비판하면 종북으로 몰아 거세한다. 애국심이나 단결을 오용하게 되면 끔찍한 결과로 나타난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세상은 무섭다. 그 바탕에는 대중의 무지가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 '1984'도 찾아서 보았다. 1984년에 영국에서 만든 영화였다.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대개 실망스러운데, 이 영화는 소설의 암담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잘 재현되어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내려앉는 절망감을 다시 느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뇌 개조를 당한 윈스턴이 텔레스크린의 빅 브라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I love you."라고 독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윈스턴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I hat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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