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가 쓴 걷기 예찬서다. 책은 걷기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그중에 하나를 고르면 이렇다.
걸을 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걷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걷기만 하면 순수한 존재감을 되찾을 수 있고, 어린 시절을 만들어낸 삶의 소박한 즐거움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걷기는 부담을 덜어주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도록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그 영원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걷기가 어린아이의 놀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날의 날씨와 태양의 광채, 나무의 크기, 푸른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것이 걷기다. 경험이나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너무 많이 걷거나 너무 멀리까지 걷는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봐버려서 비교밖에 하지 않는다. 영원한 아이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비교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날, 몇 주 동안 걸을 때 우리가 결별하는 것은 단지 직업과 이웃, 사업, 습관, 근심, 걱정만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과 얼굴, 그리고 가면까지 버린다. 걷는다는 것은 오직 우리의 몸만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 중 어느 하나도 더 이상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식이나 독서, 그동안의 관계들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다. 두 다리만 있으면, 그리고 볼 수 있는 두 눈만 있으면 충분하다. 걸어야 한다. 혼자 떠나야 한다. 산을 오르고 숲을 지나가야 한다. 사람은 없다. 오직 언덕과 짙푸른 나뭇잎만 있을 뿐이다. 걷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어떤 역할을 할 필요도 없고, 어떤 지위에 있지도 않으며, 어떤 인물조차 아니다. 걷는 사람은 단지 길 위에 널려 있는 조약돌의 뾰족한 끝 부분과 키 큰 풀의 가벼운 스침, 바람의 서늘함을 느끼는 몸뚱이일 뿐이다. 걷는 동안 세계는 더 이상 현재도, 미래도 갖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아침과 저녁만 반복될 뿐이다. 매일 같은 일만 하면 된다.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걸으면서 7월의 어느 저녁의 빛에 잠긴 바위가 띠는 푸른색, 정오의 올리브나무 잎사귀가 발하는 은빛 섞인 초록색, 아침의 보랏빛 언덕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은 과거도, 계획도, 경험도 없다.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아이가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유인원이 땅에서 손을 떼고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사유하기 위해 느리게 걸을 줄 아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또한 종말의 때에 마지막 남을 것도 걷기다.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모든 게 파괴되고 문명도 사라져버리면 연기가 솟아오르는 인류의 폐허 위에서 할 일이라고는 걷는 것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지은이는 걷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이룬 열 명의 사상가를 소개한다. 니체, 랭보, 루소, 소로, 네르발, 칸트, 프루스트, 벤야민, 간디, 휠덜린이 그들이다. 고통의 때에 오로지 걷고 또 걸은 니체, 바람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 몽상하는 고독한 산책자 루소, 자연과 야생의 친구 소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시계 칸트, 진리의 실천가 간디 등은 모두 걷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느리게 걷고 깊게 사유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책상머리에만 앉아 하나의 사상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걸으면서 구상하는 사람은 다른 책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사고에 의해 무거워지지도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걷고 싶다는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걸 보았다. 히말라야, 산티아고, 지리산, 국토 종단 등 전에 품었던 길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물론 지은이가 거창한 걷기를 권장하는 건 아니다. 집 주변 일상의 산책도 훌륭한 걷기다. 걷기는 마음의 문제지 결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드물게는 멀리 나가보고도 싶은 것이다. 올 가을엔 건수 하나 만들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