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 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 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 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 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 채는
아직 면산(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이 지천인데
경전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둥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부도(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 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武林)으로 돌아가네
- 선림원지(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가을은 폐사지 답사가 제격이다. 선림(禪林), 이름도 좋구나. 선림을 안은 미천골 단풍도 유명하다지. 쌀을 씻은 물이 냇물을 하얗게 만들었다고 해서 '미천(米川)'이란다. 심심산골에 선 수련원을 만든 신라인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을까, 그곳에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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