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먹은 죄 / 반칠환

샌. 2014. 10. 21. 13:11

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

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

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

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

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

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

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 먹은 죄 / 반칠환

 

 

생명은 다른 생명으로 산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느라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야 했던가. 우리는 그걸 먹이사슬이라 부른다. 인간계 안에도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 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의 몫을 뺏는 게 불가피하다. 어쩌면 자연계보다 더 냉혹하다. 현대의 원죄는 '먹은 죄'가 아닐 수 없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율법대로 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군중에게 예수가 "당신들 가운데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시오" 라고 한 의미도 이러할 것이다. 다른 생명을 취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개체 생명의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먹이사슬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질서다. 자연은 무위(無爲)의 세계다. 반면에 인간 군집은 유위(有爲)란 점이 다르다.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이 여기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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