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는 짧고 가벼운 글을 주로 읽는다. 길고 무거운 주제는 감당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 무려 1천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호흡이 너무 느려서 이런 소설은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인간적이다>는 소설가 성석제의 짧은 이야기집이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한 편이 서너 장 정도밖에 안 되니 콩트에 가깝다. 굳이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고등학교 때 배운 용어로 장편소설(掌篇小說)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장에서 팝콘을 먹듯 즐겁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 짧은 글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보석을 만나는 것 같다.
소설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소설가의 부엌에서 맛난 음식으로 변한다. 주변의 몸짓이 모두 소설가의 촉수에 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단장된다. 소설가는 재구성의 마술사며 요리사다. 이야기는 소재도 소재지만 음식처럼 요리하는 손맛에 달려 있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받은 이야기가 있다. 이러이러한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엄포를 놓고는 돈을 보내라고 큰소리친다. 그 앞에 검찰에 출두하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런데 날짜가 7월 17일이다. "17일은 제헌절인데 공휴일에도 검찰은 근무하나요?" 당황한 사기범이 이렇게 말하더란다. "그럼 혼자 잘 먹고 잘 사세요, 인마." 이걸 인생의 그늘이 배어 있으면서 유머러스하게 그리는 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
지은이는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소설의 작은 기미, 짧은 이야기 앞에서 나는 특별히 더 긴장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고압선에서 튀는 불꽃 같은, 서늘한 한 줄기 바람처럼 흘러가고 벼락치듯 다가오는 우연과 찰나의 연쇄가 나를 흥분시킨다. 이야기라는 인간세의 보석에 나는 언제나 홀려 있을 것이다. 소설 쓰는 인간이다, 나는,"
이런 책을 읽으면 나도 제대로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소설가만큼 잘 쓰려고 하면 절대로 시작할 수 없겠지만, 그냥 내 식대로 내 만족을 위해 쓴다면 못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멋진 작품을 남기는 것보다,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일이어서 소중하다. 글을 쓰는 것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사진을 찍는 것이나, 그 대의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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