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한중(閑中) / 서거정

샌. 2015. 2. 11. 12:11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가로이 읊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한가로이 거닐고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즐기네

 

白髮紅塵閱世間

世間何樂得如閑

閑吟閑酌仍閑步

閑坐閑眠閑愛山

 

- 閑中 / 徐居正

 

 

내 구미에 맞는 시지만 딴지를 걸어보련다. 유한계급의 한가한 삶이란 여러 하인과 노예의 희생이 있어 가능한 게 사실이다. 그들의 노동과 시중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불한당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한가롭게 살고 싶건만 한가롭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의 시간과 돈을 뺏은 특정 계층의 여가가 음풍농월을 낳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과거의 거대한 유적이나 건물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편이 불편한 이유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안락함의 바탕이 제삼 세계의 값싼 노동력 덕분임을 모르지 않는다. 착취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디나 어느 시대나 존재하고 있다. 내가 편안하니 만족이고, 꺼림칙하지만 태연한 척할 뿐이다. 우리는 대개 가해자면서 피해자다.

 

그렇다고 이 시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자격이 있으면서도 한가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한가함도 아무나 즐기는 게 아니다. 바쁘게 살아온 현대인에게는 어쩌면 제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가롭다고 해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건 아니다. 한가란 '함 없이 함'이다. 노년에 주어진 최대의 특권이 한가함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옛사람은 바쁜 젊은 시절에 즐기는 한가함이야말로 제대로 된 한가함이라고 말한다. "未老得閑方是閑[젊었을 적 한가로움이라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흔 / 최승자  (0) 2015.02.23
미황사 / 김태정  (0) 2015.02.16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 가네코 미스즈  (0) 2015.02.07
가령과 설령 / 박제영  (0) 2015.02.02
석양 / 백석  (0) 2015.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