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의 자전적 에세이다. 출생에서부터 기자 생활하던 1963년까지를 기록한 자서전이다. 선생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체포돼 다시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자 시골에서 은거하며 이 기록을 남겼다. 아쉽게도 선생의 청년 시절까지만 정리되어 있다.
<역정>은 선생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일제 식민지에서 태어나 해방과 6.25전쟁, 4.19와 5.16 쿠데타를 겪으며 비판적 지성을 키워 나간다. 특히 통역 장교로 근무하며 전장을 누빈 경험은 선생에게 민족과 역사의식을 길러준 귀한 시간이었다. 진실을 찾아 나선 평생의 역정이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 책을 통해 그 과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공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정>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정신은 정의감이다. 불의를 선생은 참지 못했다. 고집이랄 수도 있는 선생의 에피소드는 책의 여러 군데서 만날 수 있다. 대쪽 같은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선생은 살았다.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했다는데 선생의 뛰어남이 있다.
가짜 우상에 맞선 선생의 투쟁은 초인적이었다 할 수 있다.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차례 해직되고, 다섯 번이나 구속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저서는 8, 90년대 대학생들에게 정신적 지표가 되었다. 나는 강연회에서 선생을 두 번 만났지만 표정과 어투에서 느껴지던 카리스마를 잊을 수 없다. <역정>을 통해 선생의 젊은 시절을 따라가면서 더욱 존경심이 깊어졌다.
1951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장교들끼리 진주에서 회식이 있었다. 선생은 옆에 앉았던 기생에게 술 뒷자리를 청했다. 전시에 장교의 말은 거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술자리가 파하자 여자도 없어졌다. 화가 난 선생은 기생의 집으로 찾아가서 총 한 발을 발사하며 따라나오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젊은 장교님, 잘 들어두세요. 아무리 미천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총으로 굴복시키려 들지 마세요. 여자란 마음이 감동하면 총소리 내지 않아도 따라갑니다. 당신도 차차 사람과 세상을 알게 될 겁니다. 돌아가세요.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선생은 여자의 기품과 위엄에 눌려 큰소리칠 용기를 잃고 진심으로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록 기생이지만 인격적 위대함에 대해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진주 기생 일화는 사소한 것 같지만 어쩌면 이 책을 관통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돈과 권력에 쉽게 무릎 꿇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역정>은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한 한 위대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시퍼렇게 날이 선 정신이 여전히 살아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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