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거리는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파란 하늘 같은 게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아무도 다정한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에 몰랐고
청결한 눈짓만 남기고 모두 떠나버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무디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서 졌다
그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쏘다녔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담배연기를 처음 마셨을 때처럼 현기증이 났다
나는 이국의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아주 바보였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가능한 한 오래 살기로
나이 들어서 너무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할아버지처럼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이바라기 노리코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대표적인 지한파 시인으로 한국의 문학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글을 썼다. 1990년에는 <한국현대시선>이란 이름으로 한국의 명시들을 일본에 번역 출간했다.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이란 책에 경위가 자세히 나와 있다. 책에는 1970년대에 한국을 여행한 이야기 등 한글과 한국에 대한 애정이 담뿍 들어 있다.
시인은 가장 예뻤던 시절에 2차대전과 패전을 경험했다. 그리고 아픈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 일본의 우경화를 경계하며 사회 비판 의식을 길렀다. 이 시는 일본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다. 일본에는 시인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다고 믿고 싶다.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정치인 부류만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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