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꽃을 보는 법 / 복효근

샌. 2018. 10. 28. 12:58

꽃이 지고 나면 그뿐인 시절이 있었다

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

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 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 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

화중왕花中王이라는 말은 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모란꽃은 그렇게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 나서 보았다

나팔 모양의 꽃잎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 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있다

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 긴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 꽃이다

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랑이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

 

- 꽃을 보는 법 / 복효근

 

 

북향의 창을 통해 단풍으로 물든 뒷산이 보인다. 여름 잎은 초록 동색이더니 가을이 되니 각자 제 색깔로 개성을 드러낸다. 잎은 제 소임을 다하고 지기 전이 제일 아름답다. 그렇다고 시선을 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연두색 새순으로부터 혈기 왕성한 여름을 통과해 가을의 색 단장을 지나고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그 모두가 잎이다. 꽃도, 사람도, 생도 그러하리라. 과거의 꽃 시절을 연연하지 말라. 그대는 지금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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