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낳아주신 은혜' '길러주신 은혜'
이런 이야기를 전 듣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와 전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거지요.
그저 무슨 인연으로, 이상한 관계에서
우린 함께 살게 된 거지요. 이건
제가 어머니를 싫어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제 생을 저주하여 당신에게 핑계 대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전 재미있게도, 또 슬프게도 살 수 있어요.
다만 제 스스로의 운명으로 하여, 제 목숨 때문으로 하여
전 죽을 수도 살 수도 있어요.
전 당신에게 빚은 없어요 은혜도 없어요.
우리는 서로가 어쩌다 엃혀 들어간 사이일 뿐,
한쪽이 한쪽을 얽은 건 아니니까요.
아, 어머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난 널 기르느라 이렇게 늙었다, 고생했다"
이런 말씀일랑 말아주세요.
어차피 저도 또 늙어 자식을 낳아
서로가 서로에 얽혀 살아가게 마련일 테니까요.
그러나 어머니, 전 어머니를 사랑해요.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차피 우린
참 야릇한 인연으로 만났잖아요?
- 효도에 / 마광수
천륜(天倫)을 강조하는 건 이 세상에 천륜 관계란 없다는 반증인지 모른다. 가정을 천륜의 올가미로 묶으려는 의도는 딴 데 있는 건 아닐까. 효(孝)와 충(忠)은 지배층에 의해 왜곡되기 쉬운 이데올로기다. 모성(母性)도 마찬가지다. 만약 모성이 있다면 천부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봐도 핏줄의 바닥에는 이기성과 집착이 깔려 있다. 사랑과 희생의 허울로 화려하게 장식한 게 모성 신화다.
마광수 교수는 너무 솔직하고 당돌해서 시대의 미움을 받았다. 표준과 다르다고 그의 독특한 취향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은 효 윤리에 반발해서 27세 때 쓴 시다. 문학이란 기성 도덕에 대한 도전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체제에 곱게 길들어진 사람보다는 이런 이단아가 그립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을 보는 법 / 복효근 (0) | 2018.10.28 |
---|---|
죄와 벌 / 김수영 (0) | 2018.10.21 |
산욕 / 나혜석 (0) | 2018.10.08 |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0) | 2018.10.01 |
가난한 꽃 / 서지월 (0) | 201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