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죄와 벌 / 김수영

샌. 2018. 10. 21. 09:09

남에게 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죄와 벌 / 김수영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김수영 시인밖에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치부를 이 정도로 적나라하게 까발려도 되는지 고개가 저어진다. 우산으로 여편네를 패고는 우산 두고 온 게 아깝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인간쓰레기라고 부를 만하다. '성(性)'이라는 시는 더 노골적이다. 이런 시가 발표되면 부인의 심정은 어떨까. 당시 상황에 대한 부인의 설명은 이렇다.

 

"광화문 근처에서 과외 공부를 하는 큰아들 준을 기다리는 동안 당시 조선일보사 모퉁이에 있던 영화관에서 페데리코 펠리니(Pederico Fellini) 감독의 '길(La strada)'을 보았다. 수영과 나는 좋은 영화가 개봉되면 항상 같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은 다섯 살 된 둘째 아들 우도 함께 갔다. 영화를 잘 보고 나오는데 수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나를 사정없이 때렸다. 대로변에서, 그것도 어린 아들 앞에서 부인을 때리는 시인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시에다 우산을 두고 온 일이 아깝다고 말하는 시인의 감정에는 무엇이 섞여 있었을까?

그 일이 있고 한참 후에야 그날, 수영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다. 일단 장남의 과외 교사가 신통치 않아 수영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 아니 그보다는 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와 엔서니 퀸이 남루한 모습을 한 채 방랑하는 야바위꾼으로 나왔던 그 영화. 상영 내내 펼쳐지던 황량하리만큼 넓은 영화의 공간. 영화 속 주인공들의 기형적인 사랑과 욕망. 그리고 수영과 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수영은 나를 때리고 '죄와 벌'을 썼는지 모른다. 수영은 그날 일에 대해 변명 한 마디 하지 않았다. 1958년 가을이었다."

 

특수하게 보이는 케이스가 보편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다만 우리는 도덕과 품위라는 가면을 쓰고서 참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인간성의 어두운 심연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길'을 보고나서 이렇게 난폭해질 수도 있구나, 라는 게 너무 생소하.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걱정 마, 안 죽는다 / 유안진  (1) 2018.11.05
꽃을 보는 법 / 복효근  (0) 2018.10.28
효도에 / 마광수  (0) 2018.10.14
산욕 / 나혜석  (0) 2018.10.08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0) 201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