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송찬호

샌. 2018. 11. 10. 10:54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병이 깊어 이제 짐승이 다 되었습니다

병든 세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황홀합니다

이름 모를 꽃과 새들 나무와 숲들 병든 세계에 끌려 헤매다보면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곤 합니다

가만, 땅에 엎드려 귀대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종종 세상의 시험에 실패하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번씩 세상에 나아가 실패하고 약을 먹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리우면 당신들의 세상 가까이 내려갔다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지난 번 보내주신 약 꾸러미 신문 한 다발 잘 받아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소식 주지 마십시오

병이 깊은 대로 깊어 이제 약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병든 세계를 헤매다보면

어느덧 사람들 속에 가 있게 될 것이니까요

 

- 이곳에 숨어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 송찬호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깊은 병에 걸리면 치료는 사양하고 산속으로 숨으리라. 머리 하얘지기까지 이토록 살았으면 됐다. 운명에 저항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 조건은 있다. 고통이 적어야 한다.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라면 의료 시설의 도움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제일 무섭다.

 

이것이 시인의 실제 체험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의 은유인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때로 약 먹는 일조차 잊고' 지내는 황홀한 세계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주체적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다. 꼭 병이 들어야만 하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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