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래서 / 김소연

샌. 2018. 12. 2. 11:14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 그래서 / 김소연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친구를 멀리 하고 직장 동료나 아는 사람들과 모두 거리를 두고, 자신을 고립된 상태로 둘 것. 예술을 한다는 것은 혼의 문제와 접하는 것이므로 행복과 안정에 가까워지면 그만큼 거기서 멀어진다. 진실로 문학을 목표로 한다면, 고독을 향해 고독을 누르고 고독을 초월하라. 자신 이외의 곳에서 힘을 구하려 하지 마라. 불안, 분노, 고독감, 슬픔을 돌진해나가면 손대지 않은 문학의 금광이 펼쳐지고, 밟지 않은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자폐가 아닌, 앞을 향한 '개인', 앞을 향한 '활'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과 정반대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정이 아니고 불안정, 질서가 아니고 혼란, 집단이 아니고 개인, 협조가 아니고 고행, 타협이 아니고 반항, 즉 반사회적 존재이다. 그 입장에 서봐야 보이지 않던 고통이 보이고, 갈등이 생기고, 불꽃이 튀는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 두 분의 결이 다르긴 하지만 치열한 작가 정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는 바가 있다. 문학은 유희가 아니라 처절한 자기 싸움이다.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는 일이다. 슬픔이 말라가도록 고독의 극한까지 가보는 일이다. 그것이 고통만은 아니리라. 아 맛있다, 라는 정신의 희열이 기다리고 있다. 이젠 결과물이 중요하지 않다. '나' 홀로의 자족과 자존감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