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로가 따라오다가 뒤쳐졌다.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짊어진 어느 노인을 만났다. 자로가 묻기를 "여보시오! 우리 선생님을 만나셨습니까?" 그 노인은 말하기를 "손톱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곡식조차 구별 못하는 사람을 누가 선생님이라 하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김을 맨다.
子路 從而後 遇丈人 以杖荷조 子路問 曰 子見夫子乎 丈人 曰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植其杖而芸
- 微子 5
공자 일행에서 뒤처진 자로가 또 다른 은둔자를 만난다. 공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자로에게 노인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손톱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곡식조차 구별 못하는 작자는 선생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도 당시 유학파에 대한 비판의 하나였을 것이다. 육체적인 일을 천시하는 풍조가 유학에는 애초부터 배태되어 있는지 모른다. 조선시대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자 왈 맹자 왈만 읊으며 노동자와 기술자는 하대했다. 실학이 너무 늦게 등장한 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다.
콩과 보리를 구분 못하는 바보를 '숙맥'이라고 한다. 콩 숙(菽), 보리 맥(麥)이다. <논어>에서는 공자의 관심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책을 통한 배움과 관료 되기에 집중되어 있다. 바른 정치를 통해 세상을 개선하려는 주체에 민중은 제외되어 있다. 공자와 유학의 한계다. 머리보다 몸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은둔자의 전통은 <도덕경>에도 잘 드러나 있다. 뒤에 불작불식(不作不食)이라는 불교 정신으로도 구현된다. 여기 나오는 은둔자의 지적을 자로가 얼마가 숙고하고, 스승과 논의해 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