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파티마의 은총

샌. 2019. 9. 16. 11:18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가톨릭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세 군데 모두 성모 발현지다. 1917년 5월 13일, 작은 마을 파티마에 살던 세 아이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그 뒤로 10월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차례나 발현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파티마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기념 건물이 들어서 있는 천주교의 대표 성지다.

 

지난 6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아내가 제일 가보고 싶어 한 곳이 파티마였다. 가톨릭 신자로서는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성지 인근에 있는 숙소에서 묵었고, 파티마에 머문 시간도 다른 팀에 비해 길었다. 그래서 아내는 세 번이나 성지를 찾을 수 있었다. 가던 날 오후에는 가이드의 안내로 성지 전반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저녁 식사 후 자유시간에는 경당에서 열리는 촛불 미사에 참예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미사에도 나갔다. 성지 순례 팀이 아닌 패키지여행에서는 드문 행운을 누린 셈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아내는 3주 동안 밤낮으로 잠만 잤다. 시차에 따른 여행 후유증치고는 꽤 심했다. 그런 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한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돌연 불면증이 없어진 것이다. 아내의 불면증은 증상이 매우 심했는데 수년째 정신병원에 다니며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처방받고 있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심할 때는 수면제를 먹어도 효과가 안 나타나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오고 혼수상태를 경험한 뒤 불면증이 없어진 것이다. 대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현상이겠지, 라고 여겼는데 믿기지 않는 일이 석 달째 계속되고 있다. 새벽 서너 시가 되어도 잠 못 들던 사람이 밤 11시만 되면 졸린다고 방으로 들어간다. 어떤 날은 잠꾸러기인 나보다 더 일찍 잠에 빠진다.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서도 아내는 약 도움 없이 나보다 빨리 잠이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수면제를 더블로 먹어도 시집에서는 잠들기 어려웠다. 며칠 전에는 이제는 병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의 허락도 떨어졌다.

 

조심스러워 표현을 아낄 뿐 아내는 이것을 '파티마의 은총'이라고 믿는 눈치다. 아내의 신앙심으로 볼 때 당연히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는 게 마땅해 보인다. 파티마 성지에서는 광장 초입에서 경당까지 무릎 걸음을 하면서 기도하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도 그런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아내도 머무는 시간이 충분했다면 그 길을 따라 무릎 고행을 했을지 모른다. 그럴 만큼 정성이 깊었다.

 

불가지론자인 내가 봐도 아내에게 일어난 변화는 신기하다. 몇 달 전만 해도 아내는 약에 취한 채로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사리 판단도 분명하지 않았다. 수면제가 없으면 아예 잠들 수 없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불면증으로 고통받던 기간이 5년을 넘었다. 여기저기 찾아다닌 정신병원도 여러 군데였다. 그런데 여행 - 파티마 성지 - 에서 돌아온 뒤 모든 게 일변했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을 때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있다. 성경에도 "믿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이 여러 번 나온다. 기적은 없다고, 인간의 무지가 기적을 믿게 만든다고 더는 큰소리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은 논리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깨우친다.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은총'과 '기적'을 감지하지 못하는 게 인간의 진짜 무지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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