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진보와 보수

샌. 2019. 8. 23. 11:57

"보수의 윤리는 합법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말이다. 요사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정치 공방이 거세다. 조국 후보자는 진보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딸에 대한 의혹에 대해 그는 말했다. "적법한 행위였고 부정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합법이나 적법은 진보에서 변명으로 쓸 말이 아니다.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한때는 '강남 좌파'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제는 '진보 귀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진보 귀족은 말로는 개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삶은 전형적인 기득권층을 닮았다. 합법이라는 그늘 뒤로 숨어서 제 이득 챙기는 데는 양보가 없다. 따지고 보면 법 자체가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합법을 행위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진보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통상 자유한국당을 보수, 더불어민주당을 진보로 나눈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더불어민주당이 보수이고 자유한국당은 수구 우익이다. 정의당이 진보이고, 해산된 통진당이 좌파라고 봐야 맞다. 우리 사회는 보수가 지배하고 있다. 민주당은 진보적 이념을 가진 유권자를 흡수하기 위해 진보 정당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옳은지도 의문이다. 정확히는 기득권과 비기득권으로 나누어봐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다툼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기득권 세력 간의 충돌일 뿐이다. 진보 기득권과 보수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보, 보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사회 개혁은 그런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나라의 주인이 과연 누구인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

 

최근에 김규항 씨가 블로그에 글 한 편을 올렸다. 제목이 '자기 해방'이다. 옮겨 본다.

 

많은 인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조국이 법적 경계를 넘나들며 부와 온갖 기득권을 취하는 첫 인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조국이 '진보'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민이 틀렸다. 한국에서 '진보'라 불리는 세력이 보수 기득권 세력에 맞서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옹호한 건 30년 전 이야기다. 진보가 다수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뽑아 올려 제 부와 기득권을 취하는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된 지 이미 20여 년이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그들의 적이 아니라 경쟁자다. 그들이 여전히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옹호하는 시늉을 하는 이유 또한 '경쟁력'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민이 진심으로 분노할 대상은 20여 년이나 그런 시늉을 믿고 기대를 버리지 않는 자신이지, 이해 추구에 성실한 개인으로서의 조국은 아니다. 조국은 진보의 특수가 아니라 보편이다. 조국이 아니라면 제2, 제3의 조국이 있을 뿐이다.

 

오늘 한국은 하나의 민족도 국가도 아니다. 진보 보수로 나뉜 사회도 아니다. 일반적 범주의 자본주의 사회라 하기도 어렵다. 소수의 진보/보수 기득권 계급이 인민의 노동과 권리를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순수한 약탈 사회다. 인민은 아귀다툼의 한 진영에 자발적 동원됨으로써 약탈 사회를 지탱하는 동력이 된다. 그중에서도 결정적 역할은 진보 기득권 세력에 자발적 동원되는 인민이다. (보수 기득권 세력은 실제로도 보수 기득권 세력이며 어떤 다른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지지하는 인민을 그리 비웃을 건 없다.) 진보 기득권 세력의 최근 행동대장으로서 조국의 '애국이냐 이적이냐' 선동에 열렬히 호응하는 인민이, 그 실체도 모호한 사법개혁이나 공수처 설치가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실을 바꿔줄 거라 믿는 인민이, 조국의 이해 추구 행태에 새삼 실망하고 분노하는 건 슬픈 코미디다.

 

인민이 제 노동과 권리를, 삶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발적 동원을 멈추는 것이다. 약탈 시스템 안에서 상대적 기대를 미련없이 버리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현실 너머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대로 된 좌파 정당이나 대안 정치 세력도 없지 않느냐 한탄할 것도 없다. 그런 게 없어진 이유가 인민이 약탈 시스템으로 몰려갔기 때문이듯, 빠져나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꾸려진다. 관심을 두지 않아서일 뿐, 그 작업에 부릴 수 있는 진지한 활동가와 지식인들도 보여지는 것보다는 많다.

 

더 밀릴 게 별로 없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좌파가 씨가 마른 지 반세기가 넘은 미국에서도 사회주의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가. 조국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다시 알려주었다. 어떤 우호적인 얼굴을 한 정치 세력이나 엘리트도 이 약탈 사회에서 인민을 '대시 해방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변화는 오로지 인민의 자기 해방, '자기 해방 하려는 인민'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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