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팔랑귀와 불신지옥

샌. 2019. 8. 5. 11:47

아내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 방송에 나오는 내용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TV는 온갖 건강과 의학 정보를 전한다. 몸에 좋은 약이나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금방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아무 관심 없는 나까지 끌어들일 때가 많다. 내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우리 집은 건강식품점을 차려도 될 것이다.

 

아내는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기 쉬운 타입이다. 실제로 돈을 뺏기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2천만 원을 갖다 바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휴대폰 배터리 덕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기범과 휴대폰 연결이 끊어졌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한다.

 

나는 아내가 홈쇼핑 방송을 보는 게 제일 무섭다. 나도 유혹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아내는 오죽하겠는가. 까짓거 반품하면 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 버린다. 그러니 돌려보내는 비율이 상당하다. 사는 쪽이나 파는 쪽이나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행히 아내도 부작용을 깨달았는지 요사이는 홈쇼핑 방송을 애써 외면한다. 택배 아저씨가 누르는 벨 소리가 현저히 줄었다.

 

나는 이런 아내를 '팔랑귀'라고 놀린다.

 

반면에 나는 의심이 많다. 아내와 정반대다. 누구의 말이든 일단 고개를 저으며 듣는다. 더구나 방송에서 나오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전문가랍시고 나와서 미사여구를 늘어놓을 수록 외면한다. 연극 각본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가 단단하다. 마음의 벽이 높다.

 

보이스 피싱은 나한테 근접도 못 할 것이다. 테스트해 보고 싶은데 전화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부정이 체질화되어 있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생긴다. 상대의 선의를 곡해해서 난처할 때도 있다. 아무리 곱게 포장해도 인간은 제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나는 믿는다. 뿌리 깊은 불신의 배경이다.

 

이런 성향은 말버릇에서도 나타난다. 아내가 무엇을 권하면 우선 "No!"부터 한다. 오늘 아침에 아내는 물었다. "생선 구워줄까?" 내 대답은 즉시 튀어나온다. "아니!" 아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잠시 뒤에 나는 말한다. "그래, 먹어볼까?" 아내는 진작부터 생선 구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게 내 특기다.

 

둘은 종교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도 차이가 난다. 아내는 세례를 받은 이래 변함없이 믿음 좋은 신자다. 나는 온탕과 냉탕을 반복하여 왔다갔다 한다. 지금은 냉담 중이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는마가 인간적으로 제일 끌린다. 진짜 스승인지 확인하고 싶은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이러니 늘 초짜 단계에 머물고 있다.

 

아내는 이런 나를 '불신지옥'이라 놀린다.

 

우리 부부의 이런 특징은 평행선을 달릴 뿐 좁혀지지 않는다. 부부는 자연스레 닮아간다는 말은 옳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부부라고 같아져야 할 필요는 없다. 다르면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도 있다. 티격태격하지만 서로에게 반면교사가 되고 자극제가 된다. '팔랑귀'와 '불신지옥'이 한 지붕 아래서 아웅다웅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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