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너무 예민해

샌. 2019. 9. 22. 14:27

나는 소리에 예민해서 탈이다. 다른 데는 둔한 편인데 유독 소음에는 까다롭다. 그래서 사는 데 피곤하다. 도시에 살면서 소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를 가나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소음 공해라는 말도 있다. 소음에 오래 노출되면 대개 무감각해지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나 같은 경우는 반대로 점점 예민해진다. 소음에 대한 면역이 약하다.

 

(시골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조용한 곳을 찾아 시골살이할 때 옆집 개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많았다. 시골 마을의 개 짖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바깥에서 여러 명이 만나는 모임이 꺼려지는 이유 중 하나가 왁자지껄한 분위기 때문이다. 술이라도 몇 순배 돌면 각자 목소리가 커지고 시장 바닥처럼 변한다. 대화의 소재가 무엇이든 이 정도 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언제 파하게 될까만 기다린다. 반면에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그래야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한다. 나와는 정반대다.

 

단체 모임은 안 나가면 그만이지만 밤에 들리는 아파트 층간 소음은 피할 수 없다. 한밤중에 위층에서 콰당, 하고 문 닫는 소리에 놀라서 잠을 깰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잠잠해질 때까지 속 끓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잠이 부족하면 다음 날 컨디션이 엉망이다. 이것이 내 생활에서 제일 큰 스트레스다.

 

(층간 소음 갈등에서 비가역적이며 완전한 해결 방법은 없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 남을 변화시키기보다 내가 변화하는 게 빠르다.)

 

어디까지 참고 어디까지 화내야 할지 구별이 안 된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있다. 가끔 집에 손주가 찾아오면 통제가 잘 안 된다. 조용히 하라고 해도 잠시뿐이다. 아이 키우는 젊은 부부는 오죽하랴 싶다. 알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절간에 들어가 살아야 할 사람이야, 라고 아내는 늘 나에게 말한다.

 

(아래층에 까다로운 노인이 살아서 피곤해 죽겠어. 우리는 조용하게 있는데 시끄럽다고 하니 우린들 어떻게 하란 말이야. 아휴. 위층에서는 이렇게 불평할지 모른다.)

 

아파트 같은 밀집된 생활에서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 배려에는 내 행동을 조신하게 해야 하는 것과 함께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내하는 것도 포함한다. 집집마다 삶의 태도나 생활 패턴이 다르다. 내 기준에 맞출 수는 없다. 가능하면 참고 지내자고 다짐하는데 한계를 넘는 날이 있다. 빈도가 잦아지면 이사를 하는 수밖에 없을 일이다. 아파트라면 꼭대기 층이 당연히 필수다.

 

(당장 현실적인 방법은 내 몸을 고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피곤하면 옆에서 대포가 터져도 끄떡없이 잘도 잔다. 군 복무할 때 그랬다. 잠을 잘 자지 못한 날은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헬스장에 나간다. 소음 스트레스가 내 근육을 키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층간 소음도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한다. 이웃간에 대화만 되어도 현재 일어나는 층간 소음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다. 관리소에서는 당사자들끼리 만나거나 연락하지 말라고 한다. 더 큰 문제가 생길까 봐 그러는 것 같다. 중재는 한계가 있고, 소통의 부재는 오해를 낳는다. 고통을 호소하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느냐는 투로 나 몰라라 한다.

 

(옛날에 강제로 모이던 반상회라도 있었으면 싶다. 그때는 이웃이 한 달에 한 번이나마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이게 되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긍정적인 작용도 있다.)

 

나라 걱정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도 있는데, 하찮은 소리 하나를 견디지 못하고 노심초사하는 나는 얼마나 작고 가벼운가. 책을 읽어야 할 눈은 점점 침침해지는데, 쓸데없는 귀는 밝아지고, 잠은 옅어진다. 노년의 한탄거리가 자꾸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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