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우주를 만지다

샌. 2021. 1. 24. 11:52

물리학자인 권재술 선생의 과학 에세이다. 통상의 과학책과 달리 물리학과 인문학의 따스한 만남을 시도해서 특이하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특히 글의 갈피마다 직접 쓴 시가 실려 있어 딱딱한 과학 내용을 적절히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인 권 선생님은 대학 선배시다. 학부 때 조교이시던 선배한테 가르침을 받았다. 따스하고 겸손하신 분이었다. 후에는 대학 교수가 되시고 총장까지 하셨다. 대개 이과생은 세상을 보는 눈이 좁고 논리가 거친데 선배는 달랐다. 글을 잘 쓰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는 처음 만났다. 다만 당구 실력은 나와 비슷해서 재작년인가에는 하수끼리 같이 시합을 한 적도 있었다.

 

책에서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아차,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교단에서 아이들에게 상대성이론을 소개해 줄 때 '상대'라는 말을 강조하다가 이론의 핵심을 놓쳤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빛의 속력과 물리법칙은 모든 관찰자에게 동일하다'는 것이 상대성이론의 요지다. 빛의 속력과 물리법칙의 절대성에 기초하는 게 상대성이론이기 때문에 쉽사리 '상대'라는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절대로 보느냐에 고전역학과의 차이가 있다.

 

선생은 물리 원리를 쉽게 설명한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도 써먹었을 텐데 아쉽다. 호텔 방과 투숙객으로 아보가드로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나, 어머니와 딸의 대화로 불확정성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불확정성원리를 통해 만물의 존엄성을 알아챈다.

 

"진실은 밝혀지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실을 밝혀지지 않아야 더 가치가 있는 것도 있다. 사랑도 은밀할 때 더 사랑답듯이, 인간의 존엄, 자아, 자존, 자유, 이런 것들은 모든 개인만의 고유한 무엇이어야 하고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인간이 아닌 원자나 전자 그리고 돌멩이 하나도 존엄하다. 존엄하기에 다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을 때 더 진실답다. 불확정성원리, 그것은 만물에 쏟아진 축복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 일이다."

 

<우주를 만지다>에는 이렇듯 과학 원리를 통해 철학적 통찰에 이르는 내용이 많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물체의 이동이란 없다. 시공간에서 생(生)과 멸(滅)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우리의 인식 작용이 이동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그에 관계되는 내용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삼라만상은 네온사인처럼 생과 멸이 반복하면서 만들어내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나는 한순간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 생겨나는 것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어제의 나는 이미 죽었고 오늘 새로운 나가 태어난 것이다. 새로 태어난 나에게 어제의 나에 대한 기억이 있으므로 마치 어제의 내가 오늘까지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뿐이다."

 

과학 에세이인 <우주를 만지다>는 '별 하나 나 하나' '원자들의 춤' '신의 주사위 놀이' '시간여행'의 네 개 장으로 되어 있다. 우주, 양자론, 상대론을 책 제목 그대로 '만지듯' 친근하게 다룬다. 다른 무엇보다 물리학과 인문학이 조화를 이루며 잘 어우러져 있어 좋다. 더 깊어질 선배의 다음 책이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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