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나라 없는 나라

샌. 2021. 1. 29. 11:58

전봉준과 대원군의 밀회로 소설은 시작한다. 둘의 속은 달라도 상대가 가지고 있는 명분이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에서부터 전봉준이 체포되던 마지막까지를 다룬다. 이광재 작가가 썼고, 혼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19세기 후반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불만과 요구가 터져 나오던 시기였다. 동시에 외세는 호시탐탐 조선반도를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중심을 잡을 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도리어 일본이나 청나라에 의존함으로써 한 줌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전봉준과 대원군이 암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외세를 몰아내야 한다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1894년 3월에 고부 백산에서 1차로 봉기할 때 동학농민군은 네 가지 강령을 만들었다. 혁명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인다.

 

1.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다[不殺人 不殺物].

1. 충효를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忠孝雙全 濟世安民].

1. 왜놈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세상을 바로잡는다[逐滅倭夷 澄淸聖道].

1. 군사를 서울로 몰고가 권귀를 다 없앤다[驅兵入京 盡滅權貴].

 

다급한 조선 정부는 5월에 청에 원군을 요청하고, 기다렸다는 듯 일본도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군 정벌을 핑계로 댔지만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조선 정부와 타협점을 찾으려던 동학군은 결국 정면 대결을 선택하고 한양으로 진군하는 2차 봉기에 나선다. 그러나 신식 화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동학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진다. 1895년 1월 전봉준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혁명 1년 간의 과정을 전봉준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그린다. 옛스런 문장도 그때의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전봉준만 아니라 시대를 고민하고 변화를 꿈꾼 여러 인물이 나온다. 그중에는 이철래 같은 선비도 있고, 뜻을 같이 하는 아낙들도 많다. 겨울 들판에 스러진 무명의 백성은 또 얼마인가. 당시의 정세를 볼 때 동학혁명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실패할 바에야 왕권 타도라는 제대로 된 구호라고 내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마지막은 탄묵 스님과 호정이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 선생님, 저 재를 넘으면 무엇이 있습니까요?

- 몰라서 묻는 게냐? 우리는 이미 재를 넘었느니라. 게서 보고 겪은 모든 것이 재 너머에 있던 것들이다.

- 그럼 이제 끝난 것입니까?

- 아니다. 재는 또 있다.

- 그럼 그건 어쩝니까요?

- 그냥 두어도 좋다. 뒷날의 사람들이 다시 넘을 것이다. 우린 우리의 재를 넘었을 뿐. 길이 멀다. 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