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샌. 2021. 2. 11. 10:49

최필조 선생의 사진 에세이로 부제가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이다. 124편의 작품이 우리 이웃의 애틋한 사연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사진과 글이 절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감동의 화음을 만들어 낸다. '뒷모습', '손', '밤골', '길 위에서' 등 4개의 파트로 되어 있다.

 

작가는 교사 생활을 하며 틈틈이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볍게 책장을 넘기지만 사진 한 장에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이 담겨 있을지를 생각한다. 다른 동네의 낯선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듣고, 친해지면서 카메라에 담기까지 발품은 또 얼마나 될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내는 일입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의 말처럼 사진은 테크닉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마음이다. 작가는 주로 사람을 찍지만 꽃이나 새도 마찬가지다. 대상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은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난한 이웃을 대하는 작가의 따스한 마음씨가 사진과 글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서울에 있는 밤골에서 작가는 수 년간 집중적으로 작업을 했다. 그 기록이 3부 '괜한 참견, 뜻밖의 위로 - 밤골'에 나와 있다. 작가의 눈은 우리 사회에서 힘없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다. 그들이 나와 관계없는 타자가 아니라 내 몸의 일부임을 사진은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자문하게 한다.

 

이 책은 거만하지 않다. 무거운 사진 이론이 나오지도 않는다. 대신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우리 이웃의 모습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사진 한 장, 글 한 편이 모두 보석처럼 빛난다.

 

글 중에는 가끔 산문 형태도 나온다. '누가 그렇게 싹 털어 갔을까?'라는 글이다.

 

예로부터 크고 오래된 나무는 함부로 베지 못했다. 그것이 제 땅에 있다 해도 마을의 동의 없이 함부로 큰 나무를 베는 것은 몰지각한 행동이었다. 나무 스스로도 함부로 죽어선 안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책임지는 생명의 수가 엄청나다. 뿌리와 줄기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미생물과 곤충들, 설치류와 조류들, 나무는 거대한 터전이며 하나의 세계다. 오래된 시장은 한 그루 나무와도 같다. 길을 따라 뻗은 강인한 뿌리는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건강한 나무가 몇 백 년을 사는 것처럼 시장도 그럴 수 있다.

 

언젠가 큰 나무를 고사시키는 방법을 들은 적이 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데, 하나는 나무 밑둥의 껍질을 벗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뿌리에서 먹은 물과 영양분을 줄기로 전달하지 못해 서서히 말라죽는다. 또 하나는 나무 주변에 깊은 구멍을 파고 제초제를 묻는다. 그렇게 하면 나무가 독한 기운을 못 버티고 죽는다. 전자는 눈에 띄고 잔인해 보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후자의 방법으로 나무를 죽인단다.

 

나는 이 사회가 재래시장을 고사시키려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부디 그런 것이 아니길 빈다. 하지만 시장 주변으로 생기는 백화점이나 거대한 마트들은 너무 위협적이다. 거대한 마트가 거대한 마트를 이기려고 또 생겨난다. 재래시장 골목이 얼마나 썰렁한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재래시장 상인들에게 이런 현상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악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무기력함을 느낀다.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거대한 나무가 서서히 죽어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어, 세상은 변하는 거야!" 따위의 변명을 하면서...

 

곡물 가게 사장님은 문을 닫으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싹 털어간 잣나무에 펄쩍거리는 청설모 같아. 하루 종일 문을 열고 바쁜 척 뛰어다녀도 먹을 게 없어." 그러게 누가 그렇게 싹 털어갔을까? 어렸을 때 키우던 토끼는 배부르면 더 줘도 먹지 않던데, 우리는 왜 그렇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플까?

 

'읽고본느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를 기다리는 사람  (0) 2021.03.08
우리는 모두 외계인이다  (0) 2021.02.19
꽃으로 세상을 보는 법  (0) 2021.02.09
나라 없는 나라  (2) 2021.01.29
우주를 만지다  (0) 2021.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