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의 배짱과 스케일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분이 채현국 선생이다. 오척단구 거한, 당대의 기인, 인사동 낭인들의 활빈당주, 가두의 철학자, 발은 시려도 가슴은 뜨거웠던 맨발의 철학도, 해직기자들에게 집을 한 채씩 사준 파격의 인간, 민주화 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이 시대의 어른 등 채현국 선생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많다.
한 마디로 부귀를 초개 같이 여기고 거침없이 인생을 산 자유인이 채현국 선생이 아닌가 싶다. 이 책 <풍운아 채현국>은 2014년에 김주완 기자가 선생과 나눈 대화록이다. 선생의 말씀은 시원시원하면서 정곡을 찌른다. 김형석 교수를 멘토로 여기는 친구들이 많은데 나는 이런 삐딱한 분에 끌린다.
선생의 언행은 마치 그리스인 조르바를 연상시킨다. 선생은 젊었을 때 여러 병으로 시달렸던 것 같다. 35세 즈음에는 잇몸이 나쁘고 당뇨까지 와서 이가 다 빠져버렸다고 한다.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갔던 거부였던 분인데 돈이 없었을 리 없다. 선생의 말이 걸작이다.
"그만 처먹으라고 이 빠진 건데 그걸 또 해 넣을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당뇨라는 게 많이 먹어서 나는 병인데, 이를 안 해 넣었기 때문에 적게 먹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이를 해 넣었으면 훨씬 빨리 죽었습니다. 아무래도 잇몸으로 먹으니까 불편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이렇게 배 나오고 했는데, 허허허."
선생은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 교회를 다니거나 종교를 갖고 있나요"
"아니요. 저는 종교도 또한 돈다발 낚고 명리 휘두르는 기구로 보는 사람이니까. 불교든 기독교든 간에. 나는 학교마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보니까요."
- 그러면 종교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운이 좋아서 그런지 종교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하도 추운 데 살아서 따뜻한 곳에 가려고 새벽에 교회에 가보기도 하고, 절간 가면 풍경도 좋고 기분도 좋아서 가보기도 하고, 성당은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신이 없다는 건 내가 모릅니다. 신이 있지 않다는 건 좀 압니다. 신이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못 믿고 함께 못 살면서 보이지도 않는 신을 자꾸 추켜세워 믿게 하는 것은 결국 조직의 힘을 노리고 돈 낚는 기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황이 기껏 우리나라에 왔는데, 꽃마을이나 끌고 돌아댕기고 세월호 유족이라는 친구가 소리를 꽥꽥 질러가면서 직접 희생자들 가족이 있다고 소리를 질러야만 교황이 알 수 있게끔 만드는 우리 교회 조직들, 내가 어떻게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지낼 수 있습니까?"
-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톨릭은 그나마 개신교에 비해선 낫지 않은가요?
"그런 입장에서 보면 또 그렇겠지만, 도매업자다 보니까 소매업자의 막가는 짓이 좀 덜 표현되겠죠."
- 예수 그리스도의 원래 뜻과 달리 타락하고 변질되어 왔다는 말씀인가요?
"그렇게 말하기보다는요, 예수의 진실이 세속적인 종교단체로 조직화되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꼭 타락한 게 아니고, 성자의 진실이 이미 세속의 조직 속에서 활용될 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석가모니의 진실이 불교 교단이라는 조직이 되면 으레 그런 겁니다."
선생은 꼰대 기질을 제일 싫어한다.
- 워낙 사람을 좋아하시고 친하려 하시는데, 선생님도 '이런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부류가 있습니까?
"이제 나이 먹으니까 점점 더 있죠. 막 생깁니다. 제일 싫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체하면서 전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귀 안 기울이는 사람, 친한 체하고 이해하는 체하면서. 나이 먹으면 자기 폐쇄 속에 삽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덜합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폐쇄적이란 걸 들키면 안 되니까 다 속이고 삽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 먹은 사람 별로 안 좋아합니다."
- 나이 먹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요?
"농경사회에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크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욕망도 커봤자 뻔한 욕망밖에 안 되거든. 농경사회의 노인네는 경험이 중요하고 결국 경험이 지혜처럼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안 것은 다 틀리죠. 이게 작동을 해서 그런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해지고 점점 욕구만 남는 노욕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요즘 어버이연합 같은 완고한 노인네들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들이야말로 제일 겁 많고 비겁한 사람들로 보이거든요. 그 완고를 드러내는 게 이미 비겁하고 겁이 나서 그런 완고를 가장해서 꾸미는 거죠. 버러지 정도의 의지도 없기에 저렇게 추악한 걸 인정 못하죠, 용기가 있으면 자기가 그렇게 하면 추악해진다는 걸 인정할 줄은 알아야죠. 그 인정도 못하는 것 보십시오. 얼마나 용기가 없고 비겁한 자들입니까?"
인문학 열풍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 요사이 인문학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나는 하나도 안 높아졌다고 봅니다. 주둥이로만 괜히, 그것도 또 돈 되는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뿐입니다. 돈을 노리는 수작이죠. 단지 수작 때문에 관심이 높아졌다는 인상을 줄 뿐이지, 인문학 관심 하나도 안 높아졌어요. 사회 전체가 조금씩 나아지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존중, 관심이 살아나면 됩니다. 인문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 모두 다 돈다발 낚으려는 수작입니다."
- 인문학 강좌는 어떤가요?
"돈다발 낚으려는 수작이고 매명하려는 수작이예요. 인문학을 빙자해서 자기 명예를 높이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어요."
선생의 삶과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남은 인생은 좀 덜 치사하고, 덜 비겁하고, 정말 남 기죽이거나 남 깔아뭉개는 짓 안 하고, 남 해코지 안 하고, 그것만 하고 살아도 인생은 살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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