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다읽(12) -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샌. 2021. 9. 24. 12:28

"수많은 세대의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 왔지만, 그 예수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의 말은 별의별 뜻으로 왜곡되어 아무 뜻도 없게까지 되었다. 예수의 이름은 범죄를 정당화하고 어린이들에게 겁을 주며 필부들에게 어리석은 영웅심을 불어넣는 데에 이용, 아니 악용되어 왔다. 예수는 자기가 뜻한 것보다 뜻하지 아니한 것으로 더 자주 찬양과 숭배를 받아 왔다. 무엇보다 큰 역설은 예수가 세상에 살면서 가장 강력히 반대하던 바에 속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 종종 되살아나서는 온 세상에 널리 설교,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는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기독교 교리라는 안개가 예수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키고 있다.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가?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의 예수는 어떤 모습이었나? 예수는 기독교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말씀과 활동을 통해 예수의 본모습을 찾아보려고 시도한다.

 

현재 나의 예수관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이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앨벗 놀런(Albert Nolan) 신부가 썼다. 천주교 사제지만 전통 교리에 갇히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복음서와 예수를 바라본다. 이야기는 파국, 실행, 복음, 대결이라는 예수의 생애에 따른 네 단계로 전개된다.

 

예수는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앞으로 밀고 나가신 분이다. 피압박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그분을 움직인 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난한 자, 죄인의 친구로서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예수가 꿈꾼 세상은 그 시대의 통념을 벗어난 것이었다. 현 상태를 뒤집어엎는 혁명이 필요했지만, 회개[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억압자의 교체일 뿐임을 예수는 잘 알았다. 예수는 끝이 죽음임을 알면서도 악의 세력과 대결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저자는 예수는 이런 분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레 피력한다. 그런 점이 더 신뢰가 간다. 교리의 안개를 걷어내고 만나는 예수 또한 선입견일 수도 오해일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가 접하는 예수는 초기 기독교인인 쓴 복음서밖에 없다. 자체가 이미 오염되었으니 독해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자의 신앙관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 교회가 가르치는 예수에 대해 의문 부호를 붙이게 될 때 신앙이 한 단계 성숙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가짜다. 무엇을 믿고 아느냐가 아니라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소중함은 물론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희생적인 전 생애로 보여준 예수를 우리는 얼마나 따라갈 수 있을까. 그저 머리로만 헤아릴 뿐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빼어난 인간'이라는 제목의 단원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과소 평가하고 있다. 비단 예수를 한 종교적 진리의 교사로밖에 생각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입장에서 예수의 신성(神性)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나머지 예수를 온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으로까지 만들어버리는 사람들도 그렇다. 예수 자신의 말을 선입견 없이 당시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 할 때에 우리 앞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비범한 독자성과 엄청난 용감성과 빼어난 진실성을 가진 한 인간, 이루 형언할 길이 없는 형안을 지닌 한 인간이다. 이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그의 위대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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