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나무

토성 느티나무(2022)

샌. 2022. 10. 15. 14:45

 

고향에 내려가서 마을 둘레를 산책하다 보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이 나무로 향했다. 멀리서만 봐도 어린 시절이 왈칵 밀려오는 나무였다. 60년이 흘러도 여일하게 같은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는 나무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어머니나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서 풍기장에 갈 때면 꼭 이 나무 밑에서 쉬어가곤 했다. 장에 가는 어머니나 할머니는 머리에 늘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곡식을 가지고 가서 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 왔다. 장으로 가는 길에서 이 나무에 오면 발품을 쉬어야 했다. 집에서 장터까지는 4km 정도 되었는데, 풍기에 가까운 이 나무는 목적지에 다 왔다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토성'이 공식 행정명칭은 아니지만 어릴 때 우리는 이 나무를 토성 느티나무라 불렀다.

 

이번에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옛날 장날 풍경이 화제에 올랐다. 장날이 여자들에게는 일에서 해방되는 날이라 했다. 아이들만 좋아한 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장날이 되어야 사람들을 만나고 자유롭게 수다를 떨 수 있었을 것이다. 단골 식당에서 막걸리를 반주로 점심을 먹는 분위기가 시끌벅적했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니까 시골 장날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축제일과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전한 나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대여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나무 밑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내가 말하더란다. "집에 가면 엄마한테 일러준다. 할머니가 빗자루를 사놓고는 그냥 왔다고." 살펴보니 정말 빗자루가 없었다. 부리나케 가게로 갔더니 주인이 보관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찾아왔다고 하면서 식구들이 한 바탕 웃었다는 일화였다. 조그만 놈이 머리에 무슨 생각을 굴리다가 그때에야 할머니한테 얘기했느냐고 어른들은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장날에 얽힌 추억은 참 많다. 시골 아이들에게 장날은 온갖 신기한 구경거리가 즐비한 마당이었다. 한눈을 파느라 발걸음은 느려지고 어른들 손에 끌려다니기 바빴다. 그러다가 손이라도 놓치면 미아가 되었다. 한 번은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장터 한가운데서 엉엉 울었던 기억도 난다. 한참 뒤에 아는 사람을 만나 눈물을 거둘 수 있었다. 좁은 장터라 - 그때는 넓디넓게 보였겠지만 - 서로간에 알음알음인 경우가 많았다.

 

해 지는 나무 아래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느티나무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데, 소년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되어 나무를 찾아왔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나무는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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