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마르코복음[63]

샌. 2022. 11. 30. 10:22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어떻게 율사들이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다윗 자신이 성령에 힘입어 말하기를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도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아래 잡아놓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하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아들이 되겠습니까?"

많은 군중이 그분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율사들을 조심하시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이며, 회당에서 높은 좌석을, 잔치에서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겉꾸며 길게 기도하는 이런 자들이야말로 더욱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 마르코 12,35-40

 

 

마르코복음 12장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율사들과 논쟁하거나 모여든 군중을 가르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 예수는 일차적으로 유대교에 속한 분이었다. 유대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예수는 성서를 인용하면서 율사들과 토론한다. 예수가 가장 비판하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부패, 탐욕이었다. 예수는 유대교를 기초에서부터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보는 관점이 유대교와 다르다. 유대교 지도자나 율사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분노와 징벌의 가부장적인 하느님이다. 율법은 원 뜻과는 달리 인간을 구속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반면에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다. 전통과 관습에 길들여진 제도화된 종교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쓰이고 민중을 오도한다. 예수는 잘못된 종교의 속박에서 민중이 해방되기를 바랐다.

 

예수의 비판은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율사들에 집중되고 있다. 그들은 성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잘못된 신관을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격이다. 예수의 말을 들어보면 일차적으로 성서를 올바로 읽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리나 선입견에서 벗어난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 루터도 그렇게 성서를 읽음으로써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2천 년 전이나 5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것이다. 다수 민중의 마음을 얻고 유대교를 개혁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모른다. 기존 체제에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각오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혁명가로 부른들 크게 잘못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피를 흘리는 혁명은 아니었다. 예수는 자신이 훗날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사두가이파와 함께 주로 회당의 율사를 담당하던 바리사이파가 예수의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예수는 군중에게 율사들의 위선을 드러낸다. 이때까지만 해도 군중은 예수의 말을 즐겁게 들으며 호응했다. 아마 성전의 지도자들은 소란을 일으키는 예수를 처치할 계획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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