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인생의 의의와 가치

샌. 2023. 8. 23. 11:07

아주 오래전, 20대 때 본 책 중에서 기억에 남아 있는 몇 권이 있다. 대부분 내용은 잊었는데 책의 모양과 제목만은 뇌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책을 샀던 서점과 서가의 풍경까지 떠오른다. 그런 책 중의 하나가 <인생의 의의와 가치>다. 이 책을 가방 속에 애지중지 넣고 다니면서 조금씩 맛보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은 어두운 색의 하드 커버 표지에 두께는 얇았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1966년에 신조문화사에서 출판된 책이다. 지은이는 오이켄이라는 독일 철학자였고, 제목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와 가치에 대해 논했을 것이다. 이 책 역시 제목과 외형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정신의 창조 행위를 통해 인생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논지를 펼치지 않았나 추측한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 책의 정가가 280원이었는데 현재 중고 판매가는 30만 원이다. 동그라미 하나만 없다면 젊은 날에 대한 기념으로 소장해 볼 텐데 아쉽다.

 

'인생의 의미'는 내 젊은 시절을 사로잡던 화두였다. 당시 나에게 세상은 의미로 가득 했고, 만물은 비밀을 품고 있는 암호문자 같았다. 만물의 배후에는 객관적 진리의 세계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인생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의미는 존재하며 그걸 밝혀내고 본래의 의미대로 살 때 인생은 가치 있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제일의 과제가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일이었다. 선현들의 가르침을 나침반 삼아 나아가면 세상과 생의 비밀을 해독해 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나의 20대는 철학과 종교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시기였다. 그러나 발버둥치면 칠 수록 탈출은 커녕 점점 더 늪 속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길을 잃고 안갯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생의 의미 자체를 회의하지는 않았다. 내 머리가 명석하지 못해서 진리를 인식하지 못할 뿐이었다. 아니면 신을 향한 절대복종, 자기 버림이 안 돼서 그랬다. 지금 회고해 보는 나의 청춘은 질풍노도 가운데서 비틀거리는 상처투성이 몰골이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인생에 과연 의미가 있느냐는 의심을 품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실존주의 철학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피투(被投)'된 존재다. 전에는 허무주의라고 하찮게 여긴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폐허는 도리어 단단한 반석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의미와 관념을 향해 움켜진 손을 조금씩 놓았다. 생물학적으로 봐도 인간 존재를 비롯한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 외에 다른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극단적인 견해일지 모르지만 인간 역시 유전자나 바이러스의 매개체나 숙주 역할에 불과하지 않은가. 나는 점점 유물론자로 변해갔다.

 

이제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인생에는 의미가 없다. 다만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의미가 없지만 의미를 만들어낸다. 만들어진 의미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나온다. 따라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는 일은 가치 있다. 여기에 절대적인 잣대는 없다. 백인백색의 의미를 두고 어떻게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크게 보면 모두가 환상인 것을.

 

더 나아가 인생은 왜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볼 수도 있다. 의미/의의 속에는 '쓸모'나 '목적'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다. 볼펜은 노트 위에 글씨를 쓰기 위해 놓여 있다. 그것이 볼펜의 존재 이유며 의미다. 만약 볼펜에 잉크가 떨어졌다면 볼펜의 존재 의미는 없어지는 것이다. 인생에서 의미의 추구가 잘못하면 인간을 도구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의미를 강조하면 도리어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까.

 

예컨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자. 행복해지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남에게 자랑할 거리도 많아져야 한다. 잘못하다가는 정신없이 행복을 좇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칠지 모른다.

 

<인생의 의의와 가치> - 가끔 과거를 회상할 때 내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이 책이 떠오른다.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은 마침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 나는 이제 의미니 가치니 행복이니 하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의미를 버리니 참 자유롭고 좋다." 요사이 자주 되뇌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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