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교양 실종의 세계

샌. 2023. 9. 27. 10:39

대학교에 들어갔던 1학년 때는 '교양 과정'이라고 해서 전공과 관계없이 모든 신입생이 공통된 교육을 받았다. 그렇다고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한 기초 소양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컸다. 교과목도 국, 영, 수 중심의 고등학교 커리큘럼과 대동소이했고, 담임선생만 없을 뿐이지 사실 고등학교와 별 다른 게 없었다. 교과 수준만 약간 올라갔을 뿐이었다.

 

'교양'이라면 이과생이라도 철학이나 인문학을 접하도록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이름만 '교양 과정'이었을 뿐, 교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무척 아쉬운 점이다. '교양 과정'은 교양을 단순한 지식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나쁜 명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주간 경향' 칼럼에서 김규항 선생이 쓴 교양에 관련한 글을 봤다. 제목이 '교양의 힘'인데 선생은 교양을 인간이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힘'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박학다식이나 영민함과는 다르다. 또한 교양은 더 나은 나를 만들면서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을 품고 있다고 한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 같다. 

 

이런 본원적 의미에서의 교양이 실종된 지는 오래 된 것 같다. 이젠 '교양'이라는 말도 듣는 경우가 드물다. '정직'이나 '양심'도 마찬가지다. 요사이 정치판은 아예 교양과는 척을 진 사람이 들어와서 노는 놀이터가 된 느낌이다. 지식과 경쟁 위주의 교육이 만든 결과물인 것 같아 씁쓸하다. 천박한 교양 실종의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서걱거리기만 한다. 

 

선생의 글을 옮긴다.

 

 

교양의 힘 / 김규항

 

'교양'은 본디 수입된 말로 일본 학자들이 독일어 '빌둥'을 번역했다. 빌둥은 인간 만들기(혹은 형성하기)를 뜻하는 '멘셴빌둥(menschenbildung)'의 줄임말이다. 영어로 교양은 '컬처'인데 역시 '경작하다'는 어원을 가진다. 교양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인격적이며 문화적으로 자신을 가꾸어가는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 교육에서 교양은 또 다른 연원을 가진다. 해방 후 한국은 미국 학제를 도입해서 교육 체계를 꾸리면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을 '교양 교육'이라고 옮겼다. 서구에서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역사는 장구하지만, 그 현재적 의미는 2007년 하버드대학이 발표한 '교육과정 개편 보고서'가 잘 대변한다. 보고서는 대학교육의 목적이 리버럴 에듀케이션임을 명시하며, 기존의 지식 습득이 아니라 그것을 깨뜨리고 나아가도록 하는 것임을 매우 열정적인 어조로 말한다.

 

"리버럴 에듀케이션의 목표는 추정된 사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아래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 감각을 어지럽혀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오늘 한국에서 교양 교육은 무엇인가. 대학 입시까지는 입시 경쟁에 직접 효용성이 없는 상식과 잡식 습득이며, 대학에서 교양 과정 역시 신입생이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훑고 넘어가는 지식 쯤이다. 교양 교육은 그 연원들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교육이 나름대로 마련한 교양 교육의 개념이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교양이 더 나은 인간이 되려 자신을 가꾸는 노력이며 틀을 깨고 나아가는 비판적 개인이 되는 일일 때, 교양 교육은 교실이나 대학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삶과 생생히 부딪쳐야 한다. 괴테는 '교양 있는 개인'을 온전히 말하기 위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썼다. 빌헬름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임에도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가 아니라 예술을 추구하며 역경을 헤치고 인간적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같은 맥락에서, 교양 교육은 교양이나 교양 교육이라는 말이 수입되기 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공부만 잘 한다고 사람 되는 건 아니다.' '동무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면 못쓴다.' '인생엔 돈으로 사지 못하는 게 많더라.' 등등. 오랫동안 그저 어른이라면 아이에게 당연히 반복해 들려주던 덕담엔 교양 교육의 정수가 들어 있다. 이젠 모든 어른이 일제히 멈춘 덕담들이기도 하다.

 

교양 교육이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라진 건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노력'이 '더 비싼 인간이 되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불의하고 불공정한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열띤 논란들도, 주요한 기반은 내 새끼에게 매겨질 가격과 관련한 분노이다. 교양 교육이 사라진 사회에서, 아이들이 쉽게 각종 혐오에 빠져들고 토론보다 편 가르기로 흐르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세계는 경제, 노동, 기후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위기가 깊어만 가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기존의 가치들도 이미 붕괴했다. 한 문명이 저물어가는 듯한 시기에, 아이들이 꼭 배워야 할 건 살아남는 요령이 아니다. 혼란을 헤쳐나가며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교양이다.

 

교양이 '아이들이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인 이유는 무엇인가. 싱겁게 들릴 수 있겠지만, 교양이 애초부터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의미에서 교양은 사회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시민(부르주아)이 이전 주인인 귀족을 극복하는 문화 투쟁으로 출발했다. 단지 물려받은 신분으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귀족에게, 세련된 지적 예술적 소양이란 그저 지배계급으로서 품위 유지와 피지배계급과 분리에 사용되는 장식물이다.

 

그에 반해 시민은 인격적으로 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가꾸어감으로써 세상이 새로운 주인으로서 자격과 정당성을 증명해 내려 노력했고, 그게 바로 교양이다. 교양은 본디 '더 나은 나 만들기'와 '더 나은 세상 만들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교양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일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일 때, 분리되거나 생략되지 않을 때 성립한다.

 

근대 사회(자본주의적 근대 사회)가 안정화하고 부르조아가 지배계급의 지위를 확고히 함에 따라 교양도 애초의 역동성을 잃고 보수화한다. 교양에 수반하는 일정의 인문학적 지식과 예술적 경험 같은 것들이 껍질만 남아 그 자체로 교양 행세를 하게 된다. 교양은 자본주의 사회 상위 계급의 어설픈 귀족 흉내에 사용되는, 혹은 그들을 보좌하며 기생하는 교육받은 중간 계급이 인민과 자신을 구분하는 장식물로 전락한다.

 

더 나은 나 만들기는 더 나은 세상 만들기로부터 분리된다. 이른바 '자기 계발'은 그 극단적 형태다. 자기 계발의 사전적 의미는 '잠재하는 자기의 슬기나 재능, 사상 따위를 일깨우는 일'이니, 교양에서 나 만들기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자기 계발은 전혀 다르다. 자기 계발은 인간이 전인적 발전이 아니라 '몸값'을 높이려는 행위, 총체적 인간으로서 나를 기각하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변태적 행위이다. 자기 계발은 자본주의에서 교양의 최종적 파탄을 상징한다.

 

20세기에 생겨났다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 사회들에서 교양은 자본주의에서와 반대로, 세상 만들기가 나 만들기로부터 분리한 경우다. 이 사회들은 부르주아의 장식물로서 교양을 노동자 농민의 살아있는 교양으로 교체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소련의 지식인과 예술가에 대한 관료의 억압과 탄압, 모택동 치하 중국에서의 기괴하기 짝이 없는 하향식 인간 개조 실험(문화혁명) 등이 보여주듯, 교양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한 것이었다. 이전 역사에서 축적된 지적 예술적 자원은 반동 딱지를 붙여 삭제해버리고 새로운 교양을 만드는 데는 실패한 결과는, 현재 러시안(인)과 중국(인)에도 짙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혼란과 위기 상황에서 아이가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힘은 교양이며, 교양은 더 나은 나를 만드는 일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교양 실종의 세계'에 이미 길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는 지나치게 섬세하게만 보며, 세계의 문제는 지나치게 거대하게만 본다. 그러나 한 아이의 성장은 세계의 변화만큼 거대한 일이며, 세계의 변화는 내 아이의 성장만큼 섬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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